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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1.30 잠꼬대

잠꼬대

2019. 1. 30. 16:23 from 오래된 글들/Short

 

 

 

이성종

 

 

잠꼬대

 

 

 

약속해.

싫어.

그럼 다신 널 보지 않을 거야.

알겠어, 약속 할게.

정말 약속하는 거야.

미안해. 약속 지킬 테니까 미워하지 마, 제발.

……

미워하지 마…….

 

 

유독 위아래가 길고 가로 길이는 짧은 책이었다. 그리고 그에 반하여 책 내부의 글들은 위아래 여백이 많았다. 일반적으로 출판 되는 책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다면 시집 수준의 두께밖에 되지 않을 책이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SF판타지 요소에 사랑이야기를 가미하였으며 그 바탕엔 철학이 존재한다. 4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책은 비슷한 배경을 갖고 있고 특정 이름을 가진 주인공은 없으며, 영화를 글로 옮긴 것 마냥 장면의 묘사 위주로 이야기를 서술한다.

 

탁, 성종은 책을 덮고 앉아있던 소파 위에 모로 누웠다. 다리를 가슴 쪽으로 모아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어디 갔었어.”

 

비 냄새를 잔뜩 몰고 와서는 외투를 벗지도 않고 느리게 다가오는 남자에게 성종은 낮게 물었다. 남자는 성종이 누운 소파 앞으로 다가와 바닥에 무릎을 굽혀 앉았다.

 

“나는 너의 그런 질문을 들으면 숨이 막혀. 마치 나를 죽이려는 것 같아.”

“무슨 말이 그래? 내가 언제 너를 죽이려든 적이라도 있어?”

“아주 많지.”

 

성종은 가만히 눈을 뜨고 제 앞에 가까이 다가와 앉아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핏기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입술도 모자라 입 안까지 말라가고 있었다. 그다지 축축하지 못한 혀로 아랫입술을 적시고 다시 눈을 감았다.

 

너는 지금도 나를 죽이려 들었어. 내 눈을 피해버렸잖아. 그런 너 때문에 지금 내가 얼마나 끔찍한 기분일 지 너는 모를 거야. 너는 아주, 매우 자주 나를 추궁해. 그때마다 나는 아내를 두고 바람피운 어느 영화의 죄인이 된 기분이야. 그것도 너는 모를 거야, 내가 세상 그 누구보다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 조차도. 그리고 너는 종종 나를 떠나려 해. 아니, 비가 오는 날마다. 비는 오는데 방에 혼자 남겨진 내가 어떤 기분일지 너는 상상해 봤니? 나는 너 때문에 봄이 되기도 전에 몇 번이나 죽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몰라. 그리고 사실 너를 아주 많이 사랑해서 죽지도 못해. 그러니까 날 좀 죽이려 들지 마.

 

성종은 감은 눈 위로 살을 찌푸렸다. 잔뜩 모아진 눈썹 사이를 차가운 손가락 하나가 꾹꾹 눌러왔다. 남자는 엄지손가락으로 성종의 미간 사이에 잡힌 주름을 피려 하고 있었다. 그래, 그럼 다시 물을게. 왜 나갔었어?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성종의 얼굴에서 손을 떼었다. 혼자 남겨지기 싫어서. 그래서 비가 오기 전에 미리 나갔어. 성종은 헛웃음을 웃었다. 남자는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비가 너를 많이 닮아있더라. 네가 비 오는 날마다 밖으로 나가는 이유를 알 것 같아. 다음번엔 우산 없이 나가보려고.

 

그렇게 잠이 들었다 깬 남자는 무거운 외투를 벗어 바닥에 가지런히 놓아두고 몸을 일으켰다. 성종이 잠들어 있는 좁은 소파 위로 파고들었다. 놀라 잠에서 깬 성종은 남자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몸을 비틀었다. 남자는 양 팔로 성종의 몸을 꽉 끌어안은 채 소파 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힘을 잔뜩 주었다. 성종은 양 팔로 남자의 몸을 밀어내다 지쳐 포기하고 가만히 있었다. 남자가 성종의 이름을 불렀다.

 

“나 미워하지 마.”

“네가 할 다음 말을 난 알아.”

 

잠시간 침묵이 흐르다 성종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날 버리지 마. 날 떠나지 마. 날 사랑해줘. 날 안아줘. 날 살려줘.”

 

남자는 몸에서 힘을 풀고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성종은 곧바로 일어나 남자의 몸을 피해 바닥을 밟고 외투를 챙겨들고 집 밖으로 나갔다.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남자는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날 죽이지 마, 성종아.

 

시간이 많이 흘렀다. 성종은 돌아오지 않았고 남자는, 성종이 없어 텅 빈 공간 안에서 무엇도 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냈다. 비는 그친지 오래였다.

 

 

다시 눈 감아 널 보러 가면

그 자리에 멈춘 나를 안아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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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o_s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