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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1.30 바다가 무서워서 눈감다가 갔음

 

 

 

 2014 이성종 생일 웹진에 특전으로 실었던 단편입니다.

 

 

 

 

 

 

 

‘바다가 무서워서 눈감다가 갔음’

 

written by. 조제

 

 

 

 

 

피크를 한참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20분 째 돌아가고 있는 오디오에는 가장 좋아하는 음반, Damien Rice의 2집 9. 제 나름대로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는 창문 밖으로는 때 아닌 비. 잘근잘근 씹다가 물어뜯은 오른쪽 입술 끝에는 옅은 피. 거실 바닥을 어슬렁 걸어와 내 발 왼편에 다소곳이 앉는 나비.

 

 

“나비야.”

 

 

불러도 반응 없이 모은 다리에 파묻은 고개를 주억거리는 나비. 이름이 촌스럽게 나비가 뭐야, 나비가. 제 고양이도 아니면서 주인이 지어놓은 이름을 두고 타박하던 목소리. 나비 좋잖아. 다른 고양이들처럼 흔해 빠진 삶을 살다가 때 되면 편하게 가라고. 내 대답에 아, 짧은 탄성 아닌 탄성으로 반응하고 고개를 끄덕이던 무표정한 얼굴. 그리고 사실 그에게도 한 적 있는 이야기. “항상 영화에 보면 영웅과 나머지 사람이 있는 거 알죠? 위험한 일이 생기면 항상 그 반대방향으로 뛰어가는 그 사람이요. 그 나머지 사람이 되어줘요.” 재미있게 봤던 미국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야, 라고 소개하며 그에게 진심을 담아 전했던 말.

 

 

“나비야.”

 

 

비 냄새를 몰고 온 호원이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나비를 부른다. 주인의 부름에도 아랑곳 않던 고양이가 몸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현관 쪽으로 걷기 시작한다. 나는 서운함도 질투도 없이 그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소파 위에 모로 누웠다. 외투를 벗어 걸어놓고 내 곁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다리. 나는 그 다리를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내 머리카락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헝클어뜨리듯 만지던 손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눈을 뜨고 그를 보자 고운 입술이 예쁜 선을 그리며 꼬리가 올라간다. 나도 덩달아 미소 지어 보였다.

 

오늘 뭐했어? 기타 쳤어? 호원이 내 손바닥에 놓인 엄지손톱만한 얇은 플라스틱을 보며 묻는다. 나는 고개를 젓다가 다시 끄덕였다. 뭐야-, 말꼬리를 늘이며 힘없이 웃은 그는 다시 내게서 멀어진다. 옷가지를 하나 둘 벗고 씻으려 욕실로 향하는 그의 등을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이 잠깐 다녀간 내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가 눈앞으로 가져왔다. 천천히 오므려지는 다섯 손가락 사이로 그의 손가락들이 깍지를 껴올 것만 같다. 힘없이 떨어져 소파 아래로 늘어진 내 손의 등을 조심스레 핥는 나비. 나는 나비의 턱을 만져주다가 소파의 등받이를 향해 돌아누웠다. 잠시 후 오디오가 익숙한 마지막 곡을 노래하고 멈춘다.

 

 

“내가 사라져도 너는 여기 그대로 있겠지.”, “나비야.”, “영화 볼까?”

 

 

머지않아 욕실에서 나온 호원이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며 내 옆에 털썩 앉는다. TV 화면에는 조금 전 내가 틀어놓은 DVD를 통해 영화 한 편이 재생 중이다. 그리고 예상했던 반응. 또 이거 봐?

 

 

“질리지도 않아?”

 

 

좋아하는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는 내 습관을 뻔히 알면서도 그는 매번 같은 질문을 한다. 나는 그저 침묵으로 일관한 채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는 어느새 클라이맥스를 넘어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두 주인공은 여행을 떠났다. 떠나는 두 사람의 차 안, 문이 닫힌 수족관, 몸이 불편한 여자의 공중화장실, 여자를 업고 남자가 걷는 바다, 바다 속을 묘사한 모텔도 아닌 온천 여관 방. 다툼이 잦았던 짧은 여행 안에 두 사람의 첫 만남과 지금까지를 모두 담았다. 그리고 그건 이별여행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장면들을 보던 중에 호원이 영화 말고 다른 것 좀 보자며 칭얼거려 인상이 찌푸려졌다.

 

 

“너 이 영화 네이버 평점이 몇인 줄 알아?”

“한, 오점?”

“구쩜영이야, 구쩜영.”

 

 

별 말없이 아랫입술을 한 번 삐죽 내밀고 마는 호원 쪽을 흘깃 쳐다보고,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영화 속의 주인공 남자가 아침에 출근을 하듯 여자의 집에서 마지막 발걸음을 뗀다. 그리고 다른 여자 혹은 새 여자와 함께 길을 걷다가 주저앉아 오열을 한다. 나는 그 우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글썽이다가 무릎을 모아 양팔로 감싸 안고 그 위로 고개를 묻었다. 영화가 끝났다.

 

허벅지 위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을 보다, 호원이 있는 쪽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봤을 때 이후로는 운 적이 없었는데. 가만히 숨을 고르다 DVD를 중지 않고 보고 있는 호원을 향해 작게, 고개를 돌리지는 않은 채 속삭였다.

 

 

“도망가고 싶다.”

“……창문 밖으로 밀어줄까?”

“이 세상에서 도망가게 해주려고?”

 

 

호원은 아까처럼 힘없이 웃는다. 나도 그를 따라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 내 눈물의 의미를 알 것 같다. 그리고 아마 그는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 영화는 주인공들이 너랑 나 같아서 좋더라.’, ‘가지 마. 이리 와, 안아줄게.’

 

 

 

 

 

“뭐 입을 거야?”

 

 

오랜만에 함께하는 외출이다. 나갈 준비를 다 마친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바지를 꿰어 입는 호원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대학 시절 함께했던 동아리 동기들의 공연이 있어 보러가기로 한 날이다. 이호원과 나는 대학 2학년 당시 동아리에서 만났다. 록밴드 동아리였고,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다녀온 후 복학하니 동아리에 못 보던 얼굴이 있었던 거다. 녀석의 눈은 조금 날카로웠고 목소리는 단조로웠다. 때로는 나를 경계하고 피하는 것 같게도 느껴졌었다. 나도 딱히 그런 녀석이 맘에 들지 않았던 탓에 관계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학기가 몽땅 지나가 버리고, 종강을 2주 정도 앞두고 동아리 정기공연이 있었다. 공연을 마치고 뒤풀이 자리에서 우연찮게 녀석과 나란히 앉게 되었다. 그때까지도 생판 남이나 마찬가지였던 녀석에게 무슨 마음에선지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너 왜 나 싫어해? 내 물음이 당황스러웠는지 대답 대신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녀석이 둔탁한 소리가 나게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녀석의 얼굴은 살짝 달아올라 있었고, 술이 적당히 들어간 내 얼굴도 아마 불그죽죽했을 것이었다. 공연에 함께한 모든 선후배와 동기들은 음악을 시끄럽게 틀어놓고 호프집에 마련된 작은 스테이지에 모여 술기운과 함께 정신없이 놀고 있었다. 그 무리들 뒤로 우리는 3달 만에 처음으로 얼굴을 보며 대화란 걸 시도하고 있었다. ‘너 거기 틀렸어.’, ‘합주 좀 맞춰보자.’ 따위의 대화가 아닌 사적인 첫 대화 말이다. 마침내 입을 연 녀석은 내 귀에 대고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너 안 싫어해, 너 좋아해. 나는 붉은 얼굴로 푸하하하 웃으며 녀석의 어깨를 퍽퍽 쳐댔다. 녀석은 또 당황해서 맥주만 들이켰다. 나는 그런 녀석이 재밌어 조금씩 꼬여가는 말투와 목소리로 장난을 쳤다.

 

 

‘웃긴다, 너. 그럼 날 얼마나 좋아하는지 얘기 좀 해줘봐.’

 

 

녀석은 다시 아무 말 않다가 한참 생각하고 또 내 귀에 입술을 갖다 댔다. 너 처음 봤을 때 반했어. 그러곤 친해지고 싶었는데 용기가 없었다고 자신 없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너 진짜 웃겨! 나는 당황하기는커녕 아무렇지 않게 다시 크게 웃으며 녀석의 팔뚝을 손바닥으로 아프지 않게 몇 번 때렸다. 농담 재미있다는 내 말에 녀석은 농담 아닌데, 라고 중얼거렸고 나는 술기운에 황당한 실수를 저질렀다. 녀석의 가랑이 사이를 손으로 더듬으며 너 남잔데? 남자 맞잖아! 라며 숨이 끊어져라 웃다가 시뻘게진 녀석의 얼굴에 대고 손가락질 하며 계속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끼며 휘청하는데 녀석이 붙잡아 세웠다. 나는 녀석의 어깨에 양손을 탁, 탁 얹고 그래서? 끝이야? 사귀자고 안 해? 라고 물었다. 그러다가 녀석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웃어재끼다가 잠이 들었다.

 

―라고 다음날 이호원은 기억이 없는 내게 그날의 우리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제가 건넨 사귀어줄 거냐는 청에 내가 그러겠노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그랬음에도 우리는 다음 학기에 바로 방을 합쳐 같이 살기 시작했고, 졸업 후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금까지도 한 집에서 함께 지내고 있다. 함께한 지 6년째가 되었고, 어느덧 말로만 듣던 ‘낼모레 서른’이 되어 있었다. 누구도 뭐라하지 않았지만 스물아홉이란 나이는 많은 걸 무겁게 생각해야만 하는 나이란 걸 깨닫고 있었다. 지금까지보다 더 무겁게.

 

스물세 살짜리 우리의 만남은 그랬다. 우리는 많이 닮아서 닮은 점을 두고 가까워졌다가, 다른 점을 두고 싸워서 더 가까워졌다. 다른 점을 두고 싸운 이유는 이호원은 고집이 셌고 나는 성격이 말 그대로 지랄 같았기 때문이며, 다행히도 나는 남의 비위 맞추는 일을 잘 했기 때문에 ‘다툼’을 친해지기 위한 절차로 만들기도 잘 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많은 것이 변했고, 그리고 어느 순간 아무것도 변하지 않기 시작했다.

 

 

“이거 입어줘.”

 

 

무얼 입을 거냐는 내 물음에 대답 않고 옷가지를 뒤적이는 호원의 등에 대고, 종전에 내가 미리 골라두었던 니트를 건넸다. 그는 나를 뒤돌아보더니 내 손에 들린 것과 내가 입고 있는 상의를 번갈아 보다가 아무 말 없이 옷을 받아든다. 밝은 베이지 색의 니트, 나도 같은 색의 옷을 입고 있었다.

 

공연이 막을 내리고 어김없이 이어진 뒤풀이 자리에서 호원과 나는, 6년 전의 어느 날처럼 나란히 앉아 오랜만에 보는 지인들과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로 시작한 인사들을 짧게 나눈 그들은 저들끼리 떠들기 바빠서 우리 앞에 잠깐 앉았다가 다른 곳으로 휙휙 사라지기 일쑤였다. 나는 두통이 심하기도 했고 술을 잘 하지 못해서 오히려 그런 그들이 감사했다. 그러다 우리 앞에 정착한 사람들은 밴드 하던 시절 함께 했던 한 기수 후배들이었다. 여자애들은 말이 많았지만 엉덩이가 무거워서 꽤 오래 자리를 뜨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호원은 그저 오랜만에 만난 그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안부 따위를 묻고 나는 잠자코 있었다.

 

 

“성종선배도 한 잔 받으셔야죠.”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여자애가 소주병을 들어 보이며 내 이름을 부른다. 그 때는, 6년 전에는 선배들 앞에서 쉽게 재롱떨고, 심부름을 시키면 꼭 대가를 받으려고 달려들던 왈가닥 소녀였는데. 얇은 반지가 끼워진 그 애의 손은 어느새 조숙한 여성의 것이 되어서 내게 소주병을 기울이고 있다. 사실 그 때의 우리는 친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을 만큼 가까웠다. 동아리 내의 모든 사람이 그랬다. 학업보다 밴드가 우선이었던 우리는, 밤을 새어 연습하고 새벽엔 편의점에서 사온 컵라면 하나로 행복했고, 수업 시간에 자거나 수업 대신 동아리 방에서 자거나 했다. 기말고사 일주 전인 정기공연에, 학교 소극장에서 함에도 졸업한 선배들 외의 관객이 없었는데 그저 어떻게든 우리 힘으로 마무리 한 공연이 좋다고 밤새 축배를 들이켰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이호원과 내가 한 학기 내도록 친해지지 못했던 이유는 성격 탓이기도 했다. 어린 날의 이호원은 내성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었고, 나는 모든 사람과 다 친했다. 내가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지 않았던 사람이 호원이었는데, 아무도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고, 우리도 서로 먼저 다가갈 맘이 없었던 거다.

 

건배를 외치며 잔이 부딪히고 나는 약간 몽롱한 정신을 다잡으며 혼자 마시지 못한 채 술잔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곧 내 손에서 그것을 빼앗아 바닥에 버려버리는 호원의 손도 바라보았다. 젓가락으로 찌개 안주를 뒤적이는 이호원. 나는 그냥 잠자코 있었다. 당연해 보이는 그의 행동을 지켜보는 내 눈이 슬퍼지고 있다는 것도 느꼈다. 그날, 이호원의 고백을 들은 날 이후로 우리는 서로 닮아갔다. 닮아가다 지나쳐 뒤집어졌다. 어느새 나는 이호원의 성격을 반 이상 빼다박아 있었고, 호원 역시 이성종화 되어 가고 있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보니 나는 이호원 외에 아무도 없었고, 호원은 많은 사람을 곁에 두고 있었다. 나는 호원과 나를 둘러싼 울타리를 계속 견고히 하고 있었지만, 호원은 그 울타리의 한 구석을 꾸준히 때려 부수고 있었다.

 

 

“진희, 반지는 커플링이니?”

“이거요? 약혼반지.”

 

 

호원이 좀 전 내게 술을 따라준 후배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가리키며 묻는다. 조금 놀란 호원과 내 표정을 발견한 그녀는 나이가 몇 갠데요, 하며 옆에 앉아있는 제 동기들과 쾌활하게 웃는다. 우리는 축하한다며 웃었지만 호원도 아마 나처럼 억지로 웃는 게 분명할 것이다. 선배들은 장가 안 가요? 묻는 그녀에 호원은 가야지…… 예의 그 재미없는 대답을 말한다. 나는 말없이 테이블 위에 놓인 호원의 손가락 끝을 쳐다보았다.

 

학교 다니던 시절에도 나는 술을 잘 못했다. 분위기가 좋아 덩달아 술도 좋아했지만 금방 취하고 금방 토하고 금방 쓰러지기 일쑤였다. 2년 동안 대학 생활을 함께 했던 호원은 그런 나를 알아서, 술자리마다 바라는 것 없는 그리고 바라는 이도 없는 내 흑기사를 자청했다. 제 잔을 재빨리 들이키고 내 손에 있는 것도 빼앗아 연달아 꼴깍꼴깍 잘도 마셨었다. 그가 부축해 데려온 나를 자취방 침대 위에 눕혀놓고, 매번 화장실로 달려가 속을 게워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냥 그렇게 나를 생각해주는 호원이 좋아서 말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의 이호원은 참, 좋았다.

 

후배들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우리는 또 둘이 되었다. 말없이 일어난 나는 가게 밖으로 걸어 나왔다. 대학로도 번화가도 아닌 곳에 위치한 술집 주변은 한산하고 어둡고 조용하기도 했다. 나는 가게 건물 앞턱에 엉덩이를 쪼그려 앉아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몇 모금을 뱉어낸 후에야 두통이 좀 가시는 것 같았다. 그리운 노래 하나가 떠올라 작게 흥얼거리는데 내 옆에 다가와 앉은 누군가가 나를 따라 콧노래를 부른다. 호원은 내 손에 들린 담배를 빼앗아 바닥에 비벼 끄고는 노래를 계속 흥얼거린다. 노래는 그와 내가 함께했던 첫 번째 공연에서 연주했던 곡 중 하나였다. 넌 왜 담배 안 펴, 어울리게? 6년 전에 내가 그에게 물었던 물음이 하나 떠올랐다. 호원은 네가 싫어할까봐 끊었는데 네가 피울 줄 몰랐어, 라고 답했었다.

 

 

“성종아, 그거 기억나니?”

“뭐?”

“네가 그랬었잖아. 무엇이 나를 나로 만들었는지 궁금하다고.”

“응.”

“널 만난 후로 나한테 그건 너였는데 말이야.”

 

 

나는 살짝 웃었다. 그리고 다시 같은 노래를 흥얼거렸다. 호원의 머리가 내 어깨로 기대어 지는 게 느껴졌다.

 

 

‘그 노래 있잖아. 사실 너랑 같이 하고 싶어서 네가 멜로디 안했으면 좋겠다고 바랐었어. 기타 파트 애들한테도 그거 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그래야 내가 키보드로 멜로디 칠 수 있을 거 아냐. 그런데 알고 보니까 투기타로 가능한 곡이더라. 그때 내가 얼마나 허무했는지 너는 모를 거야.’

 

 

 

 

 

잠결에 꼭 붙잡고 있던 전화기가 울려 놀라며 전화를 받았다. 잠긴 내 목소리를 들은 호원은 오늘 회식이 있다며 전화를 늦게 해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한다. 나는 벽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후 괜찮다는 말은 삼키고 대충 ‘그래’라고 답했다. 벌써 10을 지나버린 시침이 야속하다.

 

 

‘저녁은 먹었어?’

“아니.”

‘왜 안 먹고 그래.’

 

 

그의 딱딱하진 않지만 무덤덤한 목소리가 고막을 울린다.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던 소파 위에서 몸을 뒤척였다. 탁자 위에는 켜놓았으나 어느새 꺼져있는 노트북과 담뱃갑 그리고 라이터가 그대로 놓여있다.

 

 

“네가 날 좀 걱정 하라고.”

 

 

호원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대신 담배 한 개비와 라이터를 함께 손에 들고 베란다 문을 열었다. 라이터를 켜는 소리를 들었을 호원은, 담배 피우지 말라는 잔소리를 하는 평소와 다르게 ‘끊을게, 먼저 자.’라고 말한다. 나는 전화를 끊고 담배를 피웠다. 그냥 담배 피우는 일에만 집중했다. 아무리 빨아 뱉어내도 속에 있는 알 수 없는 응어리는 사라지질 않고,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담배를 깊게 빨고 계속 뿜었다. 탁한 색의 연기가 밤하늘로 퍼져나가고, 차가운 겨울 밤공기가 그것들을 잡아먹는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쓰다만 글이 생각나 재떨이에 피우던 담배를 비벼 껐다.

 

벌써 3년째 공모전에 글을 써 보내고 있고, 2년째 호원은 언제 글 하나 제대로 써서 저 호강시켜줄 거냐는 말을 하고 있다. 그래도 나는 아직도 나를 스무 살배기로 생각하는 부모님의 후원이 있고, 그게 없는 호원은 대기업은 아니어도 번듯한 직장이 있다. 나는 호원의 집에 얹혀사는 게 분명하지만 매달 생활비를 보태고 있고, 하루 종일 집에 있는 탓에 집안일도 도맡아 하고 있다. 이정도면 쫓겨나지 않을 이유는 충분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러고 살 수는 없다는 문제도 있다. 특히나 요새는 노트북 앞에만 앉았다 하면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 와서 노리고 있던 공모전 몇 개를 연달아 놓치고 있는 상황이다.

 

오늘도 어김없이 두통이 몰려와서 나는 노트북을 켜놓고 소파에 앉아 시간만 축이고 있었다. 그냥 호원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다.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 앉은 나비가 내 손등을 핥다가 바닥으로 뛰어내려 방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꼬리를 멍하니 쳐다보다 놓쳤다.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벽시계는 꽤 요란하게 운다. 글 쓸 때 자주 사용하던 째깍째깍과 같은 준말을 떠올리며 시계만 쳐다보았다. 나는 이따금 졸았고, 잠에서 깨 사용도 않는 노트북을 꺼지면 키는 일을 반복했고, 식탁 위에 있는 리모컨을 눈으로만 찾다가 소파에서 일어나는 게 싫어 포기했고, 다시 벽시계를 보았다. 새벽 4시가 되도록 이호원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5시가 넘어서야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선잠에서 깼다. 하지만 그냥 자는 척을 했고 호원은 내 곁에 잠깐 왔다가 다시 멀어졌다. 잠시 후 방에서 이불을 가져다 내 몸 위로 덮어주는 그의 손길이 가슴 아파서 나는 아침까지 한 숨도 자지 못했다. 물론 호원 역시 씻고 식탁 의자에 앉아 조금 쉬다가, 제대로 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침도 챙겨먹지 않은 채 일찌감치 집에서 나갔다. 그때까지 나는 가만히 숨죽이고 있다가, 조용히 이불을 걷어내고 일어나 식탁 앞으로 걸어갔다. 호원이 앉았던 의자를 빼 앉고, 식탁 위로 팔을 모아 허리를 굽혔다. 앉아있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호원의 체온을 느끼며 엎드린 채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오늘도 호원은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다. 평소에 함께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문자 한 통 없는 그가 야속하다가, 먼저 연락해 볼 맘을 먹지 않는 나 자신이 미워지기도 했다. 왤까. 저녁 밥상을 다 차려놓고 전화기를 손에 꼭 쥐고 식탁에 홀로 앉았다.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연락이 없는 호원을 기다리다 지친 나는 어젯밤처럼 소파에 몸을 누이고 눈을 붙였다. 그리고 그도 어제처럼 새벽녘에 들어와 내 잠을 깨운다. 나는 잠자코 내게 이불을 덮어주는 그를 까만 눈꺼풀 안에 그리기만 했다. 그는 어김없이 몸을 씻은 후 식탁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찌감치 집을 나선다. 나는 어김없이 몸을 일으키고 그가 앉았다 사라진 식탁 의자에 앉아 그의 체온을 느끼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이호원과 나는 똑같은 하루를 나흘 동안 반복하고 있다. 그는 소파 위에 누워있는 내 얼굴을 봤겠지만 나는 나흘 동안 그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우리는 대화는커녕 어떠한 연락도 서로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내가 유일하게 말을 건넸던 사람, 아니 생물은 고양이 한 마리뿐이었다. 나는 매일 나비에게, 나비야 너 없었으면 나 벌써 자살했을 거야, 따위의 말을 했다. 벌써 다섯 번째 새벽. 오늘도 호원은 5시가 다 되어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는 처음으로 이불을 덮은 채 소파 위에서 잠들어 있다. 나는 살짝 눈을 뜨고 어둡고 좁은 거실을 달빛의 힘으로 쳐다보았다. 호원이 내게로 다가오는 게 느껴져 다시 눈을 감았다. 그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잠시 앉아있더니 떨리는 손으로 내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는다. 갑자기 이유 모를 눈물이 터진 나는 결국 흐느끼다가, 서서히 거두어지는 그의 손을 붙잡고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소파에서 떨어지며 제 품을 파고드는 나를 호원이 꽉 끌어안는다. 힘이 잔뜩 들어간 그의 팔 덕분에 맞닿은 우리의 마른 가슴이 아프기까지 하다. 나는 그가 몰고 온 찬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울었다. 엉엉 울었다. 들썩이는 내 어깨를 그는 부서져라 껴안았고, 부들부들 떠는 내 몸을 찬 손으로 따뜻하게 어루만진다. 성종아, 성종아.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가 좋아서 나는 숨이 끊어져라 한참을 울었다. 호원은 나를 품에 안은 채 맨 거실 바닥에 누워, 제가 입고 있는 코트로 내 몸까지 감싸고 나를 보듬는다. 날이 밝아오고, 푸르스름하게 밝아오는 또 다른 새벽에 비추어진 호원의 어스름한 얼굴을 나는 양손으로 꼭 붙잡았다.

 

 

“바다 보러 가고 싶어.”

“그래, 가자.”

 

 

대답을 듣고 나는 그렇게 잠이 들었다. 주말이었다.

 

 

 

 

 

나는 그간 못한 말을 다 하기라도 하려는 듯 바다로 향하는 내내, 바닷가를 걷는 내내 이런저런 말을 계속해서 종알댔다. 바다를 보니까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다. 담배 백 개 피우는 것보다 바다 한 번이 낫네. 바로 앞에 바다가 있는 곳에 집을 지어야겠어. 우리나라 바다는 이렇게 다 상업화 되어 있어서 문제야. 모텔은 이렇게 많은데 가정집은 하나도 없잖아. 그래서 나 여기 모래 위에 내가 직접 집 지을 거니까 도와줘야 돼. 여름엔 좀 시끄럽고 힘들어도 겨울엔 매일 바다 보면서 살 수 있겠다. 나는 다시 태어나면 겨울바다가 될 거야. 겨울바다 정말 좋지 않니, 호원아. 겨울에만 살아도 좋으니까 겨울바다로 태어나고 싶다. 그러면 세상의 모든 파란색과 차가움은 내가 되려고. 나는 천천히 많은 이야기를 했다. 호원은 그저 듣기만 하고 말이 없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오후 늦으막에 출발한 우리는 새파랗던 바다가 어느새 까매지는 걸 보다가, 걷다가, 커피를 사 마시고, 다시 보다가, 걷다가, 편의점에서 맥주를 두 캔 사고 신문지를 구해 모래사장 위에 깔고 앉았다. 호원은 안주 없이도 꼴깍꼴깍 잘 마시는 반면에 나는, 한 모금 마신 후 한참 쉬고 또 한 모금 마신 후 한참 쉬기를 반복하며, 어깨를 딱 붙여 앉은 호원의 체온과 바닷소리를 안주 삼았다.

 

밤이 많이 깊어지자 호원이 내게 자고 갈까 묻는다. 나는 서너 번 고개를 끄덕였고, 먼저 일어난 그가 내민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몸을 씻고 나온 모텔 방 안은 조용해서 나도 덩달아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용히 움직였다. 먼저 씻고 나온 호원은 방 침대 위에 TV도 켜지 않은 채 앉아있다. 알몸으로 나온 나는 흰 가운을 걸치고 앉은 호원의 얼굴을 슬쩍 보다가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불 끌게. 나는 짧은 대답을 해주고 눈을 감았다. 호원이 누우며 들춘 이불 속으로 따뜻하지 못한 공기가 들어와 몸을 떠는데, 따뜻한 손 하나가 내 팔을 잡아끈다. 힘없이 딸려온 내 몸을 감싸 안은 호원은 고르게 숨을 쉬며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린다.

 

 

“우리 호원이…… 누구한테 장가가려나.”

“……”

“착하고 예뻐야 될 텐데.”

“……”

“나처럼 집안일도 잘 하고, 늦게 들어와도 말없이 기다려주고, 한 주 내내 얼굴을 못 봐도 참아주고. 그치, 호원아.”

 

 

면도를 하지 않아 까칠해진 호원의 턱을 살살 어루만졌다. 심기가 불편한지 머리카락을 만지던 손가락 대신 손바닥으로 내 뒤통수를 쓸어내리기 시작한 그가 천천히 입을 연다.

 

 

“기왕 하는 말, 예쁜 말 좀 해.”

“왜? ……이제 와서 호원아, 널 좋아하게 됐나봐, 라고 해줄까.”

“이성종.”

 

 

감았던 눈을 치켜뜬 호원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하게 부른 내 이름 세 글자. 나는 그런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고 그 입술에 내 입술을 부딪혔다. 호원의 양 손이 내 어깨를 붙잡아 밀어 침대 시트에 붙이고, 그의 몸이 내 위에 올라탄다. 나를 내려다보는 호원의 얼굴이 어딘가 슬퍼보여서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내 온몸에 입술과 혀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난 후 호원이, 한참을 미친 사람처럼 울며 나를 가득 끌어안았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이 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렇게 우리의 밤은 달리고 달려 아주 멀리까지 달려갔다. 어쩌면 그에게, 나도 널 좋아하게 되었다는 고백을 단 한 번도 해준 적 없는 6년 전쯤의 어느 날들 밤으로 달려갔는지도 모르겠다.

 

 

 

 

 

아껴두고 보려고 미루고 있던 전시회가 하나 있었는데 오늘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바다의 파란색을 실제로 보기 전에 먼저 전시를 봤어야 했는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날 나는 꽤 행복했기 때문에 후회는 않는다. 그날 밤 어디론가 달려가던 우리 사이에, 나만 들었던 노래가 한 가지 있는데, 그때 나는 그 노래 가사 중 한 구절을 호원이 불러주기라도 하는 양 희열에 차서 정신이 다 없을 지경이었다.

 

 

“Before one of us has accidental babies.”

 

 

그때 그 느낌이 다시 갖고 싶어서 가사를 입술 새로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갤러리 안으로 들어섰다. 흰색 바탕에 온통 파란색으로 만든 것들만 있었다. 그림도 조각도 영상도 전부 파란색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바다의 파란색 아니, 푸른색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썩 괜찮은 모습이었다. 문득 새파란 바다 위에 호원과 나란히 누워있는 상상을 했다. 2주 전쯤 보았던 좋아하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바다 안에 있는 듯한 모양새로 꾸며놓은 온천 여관에서 밤을 보내던 두 주인공. 짙푸른 색의 벽으로는 물고기와 조개껍질, 산호 따위가 그림자 형태를 해 빙빙 돌고, 두 주인공은 조개의 모습을 한 침대에 누워 그것들을 본다. 그날 밤의 나는 아마, 그 광경을 보며 행복해하던 영화 속의 여주인공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호원은 내게 노래를 불러주지 않았지만, 그날 밤 환청처럼 들려와 나를 흥분케 했던 그 노래, 그 가사가 영화 속의 산호와 조개껍질 그리고 물고기가 되어있었다.

 

전시물을 모두 보고 갤러리를 나가기 직전에 방명록 마냥 많은 이들이 적어놓은 문구들을 발견했다. 그 앞에 서서 그것들을 차근차근 훑어보는데 눈에 띄는 게 하나 있어 휴대전화기를 꺼내들고 카메라를 켰다. 남색에 가까운 파란색으로 쓴 문장은 고작 네 마디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문장을 보고 나는 급격하게 우울해졌다. 그날 밤 보았던 까만 바다와, 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호원이 떠올랐다. 내가 행복했던 것만 기억하려고, 아니 억지로 행복했다고 기억하려고 애를 쓰고 있었던 걸까. 실제로 그때 나는 그의 얼굴이 슬퍼서,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았었는데. 두통이 밀려와서 손이 저절로 코트 주머니 속의 담배로 향했다.

 

 

「바다가 무서워서 눈감다가 갔음」

 

 

나는 다시 데미안 라이스의 노래 가사를 곱씹으며 걸음을 옮겼다.

 

 

 

 

 

꿈에서 나비가 나에게 보여준 적 없던 애교를 부리다가, 갑자기 털을 곤두세우며 그르렁 거리더니 어둠 속으로 날아가듯 뛰어가 버렸다. 나비를 쫓아 어둠 속으로 달려든 나는 발을 집어삼키는 시커먼 바닥에 푹푹 빠지는 다리 때문에 허우적거렸다.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 나비의 이름을 크게 불렀지만 나비는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삼켜졌다.

 

늦잠을 자다가 창을 때리는 빗소리에 놀라 깼다. 시간이 벌써 11시.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입에 물고 내리는 비를 구경했다. 연기를 내보내려고 문을 살짝 열자 빗방울이 들어와 팔뚝으로 떨어진다. 굵은 비가 상당히 많이 내리고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담배를 세 대쯤 태울 때였나, 눈물이 왈칵 솟구쳐서 베란다 바닥에 주저앉아 고개까지 젖히고 울어재꼈다. 울음소리가 컸지만 빗소리에 묻히리라 믿었다.

 

 

 

 

 

“다 챙겼어? 뭐 잊은 거 없고?”

“우리 호원이 고추만 챙기면 되겠다.”

 

 

나는 소리 내어 웃었고 호원도 덩달아 웃으며 오늘 밤이 기회야, 라 말한다. 한 침대 위에 한 이불을 덮고 누운 우리는 서로의 얼굴 대신 천장을 본다.

 

 

“다음에 쓸 소설에, 주인공 이름 이호원이라고 해도 돼?”

“그래.”

“나 시나리오나 극작도 해보려고. 영화나 드라마에 네 이름 나오면 내가 쓴 거야.”

“하나라도 제대로 해야 될 텐데, 너.”

“괜찮아. 내년까지 네 이름 세상에 못 나가면 나는 바다로 들어갈 거야.”

“……서른 살 되면 죽을 거라더니.”

“기억하네.”

 

 

나는 목을 꺾으며 조금 크게 웃었다. 한심하단 표정을 하고 있을 게 뻔한 호원의 얼굴이 내 쪽을 향하는가 싶더니 금세 다시 정면을 본다. 나는 개의치 않고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있지, 호원아. 나는 너랑 야한 얘기 할 때가 제일 재밌었어. 어렸을 때 있잖아. 물론 지금도 어른은 아니지만. 아니지, 호원이 너는 어른이 된 것 같아. 암튼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말이야. 스물세 살 땐가? 우리 친해지기 시작하고, 새 학년 새 학기 시작했을 때. 우리 원룸 합치고 같이 살았잖아. 그때도 내가 너희 집으로 들어갔었는데……. 너 열심히 공부 하는데 내가 키보드 두드리느라 시끄럽게 했던 거 생각난다. 음, 그렇게 같이 살다가 한 달 좀 못 돼서였던가. 자려고 누웠는데 네가 갑자기 그랬잖아, 나랑 섹스하고 싶다고. 나 그때 얼마나 놀랐는지 너도 알지. 내가 너 미쳤어? 소리치면서 네 얼굴에 침까지 튀겼었잖아. 근데 너는 혼자 막 웃으면서 어쨌는지 기억 나? 복수다! 그러면서 내 거기를 막 만지는데 나 진짜 그때 죽는 줄 알았잖아. 내가 막 밀고 때리고 꼬집고 물고 별 짓을 다해도 절대 안 놔. 결국엔 내가 알았어, 알았어, 섹스 하면 되잖아. 그랬었나? 그랬더니 너 몇 개 입고 있지도 않던 옷 벗느라고 정신없었는데. 내가 도망가려고 침대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팬티까지 싹 벗더라, 이호원. 내가 그거 동영상으로 찍어놨어야 했는데. 그래야 나중에 네 결혼식에 스크린으로 틀 거 아냐. 지금 생각하니까 아쉽네. 그러고 나서 내가 침대 위로 얼굴만 들이밀고 호원아, 네 거 터지겠는데? 했더니 너 창피해서 죽으려고 했던 생각도 난다. 나는 한 번도 남자끼리 그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거든. 물론 지금도 그래. 근데 너랑 어떻게 할 수 있었냐면, 그냥 우리가 남자가 아니라고 생각했어. 뭐 그렇다고 여자도 아니지만. 그냥 서로 아주 많이 사랑하는 그런 거 있잖아. 내가 너무 시적으로 얘기 하나? 우리 호원이 못 알아들으면 어떡해. 그러니까 이런 거지. 우리는 인간도 뭣도 아닌데 그냥 이호원은 이성종을 좋아하고, 이성종도 이호원을 좋아해서 성관계라는 걸 할 수 있는 거다, 뭐 그런 거? 음, 아니다 우리 그냥 인간 하자. 나 예전에 개가 하는 걸 봤는데 좀 그렇더라. 아, 걔네도 우리가 섹스 하는 거 보면 더럽다고 하려나. 암튼 그냥, 그 후에 처음 너랑 그거 할 때 뭘 느꼈냐면, 네가 나를 같은 고추 달린 남자가 아니라 그냥 이성종이라는 한 사람으로써 좋아하고 있다는 걸 느꼈어. 물론 너는 그냥 욕구 때문에 그랬던 걸지도 모르지만. 몰라, 너만 알지. 내가 그것까지 어떻게 알아.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였냐면 음…… 그때 너 참 좋았다고.”

 

 

천천히 한참 길게 하던 말을 멈추자 호원의 고른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자니? 낮게 묻자 대답이 없어 나도 그냥 눈을 감았다. 나는 가끔 이렇게 전래동화를 이야기 하듯 호원에게 우리의 추억을 꺼내 들려주곤 했다.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아도 그 당시 그와 내가 했던 말과 말투 등을 떠올려내 따라하며 그를 즐겁게 해주곤 했다. 가끔은 때리고 욕하며 싸웠던 일도 꺼내봤고, 또 가끔은 여느 평범한 연인처럼 사랑했던 이야기도 꺼내봤다. 종종 호원은 제가 언제 그랬냐며 버럭 하기도 했지만 언제나 내 이야기를 즐겁게 들어주었었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이불 속의 손을 움직여 호원의 손을 찾아 깍지를 꼈다.

 

 

“호원아, 내가 서른살이 되면 죽고 싶다고 한 건 너 때문이었어. 왠지 서른 정도 되면 나 스스로 나를 책임져야 할 거 같은 느낌이 들더라.”

 

 

 

 

 

호원의 출근 시간에 맞춰 일찌감치 일어나 나갈 준비를 했다. 나는 채비를 마치고 침대에 앉아 호원을 주시하고 있었다. 어김없이 바지를 먼저 입은 호원은 웃옷이 걸린 옷걸이를 뒤적인다.

 

 

“호원아, 오늘은 이거 입어줘.”

 

 

나는 한 달 전의 어느 날처럼 그의 등 뒤로, 내가 미리 골라놓은 옷을 내밀었다. 호원은 나를 돌아보고 그 날처럼 내 옷과 내 손에 들린 옷을 번갈아 본다. 나는 빙긋 웃었고 그도 미소 지으며 못 이기는 척 내 손에서 옷을 받아 든다. 오늘은 짙은 남색의 니트를 골랐다.

 

호원의 출근 시간에 함께 집 밖으로 나온 적이 몇 번 없었던 지라 느낌이 색달랐다. 밤을 꼬박 새고 먹고 싶은 빵을 사러 나왔던 적이 한 번, 나비를 데리고 아침 산책을 좀 해보겠다고 한 번, 호원의 몸이 아파 과도한 걱정과 함께 부축 하는 척을 하며 아파트 앞까지 배웅한 적이 한 번. 몇 번 있지도 않은 기억을 떠올리며 찬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호원의 뒤를 따라 좁은 건물 입구를 벗어나니 추위가 확 몰려왔다. 입구 앞에서 쉽게 걸음을 못 떼고 망설이는 나를 발견한 호원이 앞서 가던 몇 걸음을 돌려 내 앞으로 와 선다. 내 옷깃을 여며주고 코트 단추를 잠가주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뭘 그렇게 봐. 얼굴 뚫어질라.”

“지금 안 보면 또 언제 봐.”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보러오면 되잖아.”

“싫어. 안 올 거야.”

 

 

내 양 팔에 손을 얹은 채 나를 보는 호원의 눈을 한참 마주치고 있었다.

 

 

“나비, 잘 부탁해. 늦게 들어오는 날은 나비한테 늦게 들어온다고 얘기 해주고. 그리고 우리 나비, 주인은 나라는 거 명심해. 이제는 너지만…….”

“……그래.”

“출근, 잘 해.”

“……그래.”

 

 

그가 살짝 웃는다. 나는, 나도, 나도 조금 따라 웃다가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뒤 돌아보니 호원이 그대로 서 있었고, 내가 빨리 가라는 손짓을 하자 그제야 나와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한다. 나도 다시 걸음을 뗐다. 다행히 며칠 전 내린 눈이 거의 다 녹아서 짐 가방을 끄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어느 샌가 그에게 ‘성종아’는 ‘나비야’와 같은, 편하게 그리고 무감정하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어느 샌가 그는 좋아한단 내 고백에 ‘질리지도 않아?’라고 묻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서로만큼 소중한 다른 무언가가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냥 시간이 많이 지났을 뿐이었다. 그 시간 동안 우리 사이에 많은 것들이 자리 잡았지만, 시간의 무게만큼 무거운 것은 아니었다.

 

내가 사랑하는 그 영화에서, 남자주인공이 여자주인공을 떠나며 하는 내레이션이 있다. 정말 많이 좋아해서 외우고 다녔던.

 

 

‘담백한 이별이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사실 단 하나뿐이었다. 내가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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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o_s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