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곡 하나만 들어주세요. 부탁이 있거나 혹은 잘못한 일이 있을 때에만 선배 대신 형이라 부르며 애교를 떨던 성종이었다. 내 팔을 잡아끌어 피아노 옆에 세우고 의자를 빼 앉은 성종이 건반 위로 손을 올렸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건반 위를 유랑하기 시작했다.

곧 여자친구 생일이라 선물로 곡을 썼거든요.

유연하게 건반 위를 걷는 손가락들이 고운 소리들을 만들어냈다. 자식, 음악 하는 놈답네. 속은 미어져도 질투랍시고 거절을 할  수가 없어서 괜히 성종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었다. 연주가 막바지에 달하고 손가락의 움직임이 느려지고 끝을 맺을 동안 나는, 성종의 낮게 내려뜬 눈과 작게 벌어진 입술, 그리고 손의 움직임을 따라 눈동자를 굴릴 때마다 흔들리는 속눈썹을 바라보며 연주에 푹 빠져 있었다. 선배, 다 끝났어요. 나를 올려보는 까만 두 눈을 마주하고서야 감상에서 벗어나왔다.

 

 

그래서? 헤어졌어? 예쁜 여자였다. 그리고 착한 후배였고, 성종이 아깝지 않을 만큼 좋은 사람이었다. 성종이 정말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었고 또 성종을 많이 사랑해준 사람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예쁘고 사랑스럽고 행복해 보여서 그걸 내가 깨트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일만 같았다. 그렇게나 보기 좋았던 두 사람의 오늘이 어제와는 다르다는 소식을 접했다. 내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슬프게 미소 지은 그녀는,


“그리고 저, 다른 학교로 편입하기로 했어요.”


나는 “그래?” 담담히 되물어놓고 더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길을 찾지 못해서 다시, “그래” 같은 단어로 자답하는 꼴이 되었다.

 

 

문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했다. 벨을 누를까, 문을 두드릴까, 손을 몇 번을 들었다 도로 내렸다. 위로를 해줘야겠다는 마음에서 성종의 집 앞까지 온 건 아니었다. 그저 발이 아니라 마음이 닿는 대로 움직인 결과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또 스스로가 우스워져서 헛웃음이 났다.

선배, 저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요. 선배, 저 고백했어요. 선배, 저 여자친구 생겼어요.

나도 그 마음을 아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다 아는데. 성종에게는 고작해야 과선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게 우스워져서.

용기를 내서 벨을 눌렀다. 잠깐 동안 문이 열리지도 않고 아무 소리도 없어서 집에 없나 했는데 문이 열리고 그 뒤로 작은 얼굴이 드러났다. 술 냄새가 훅 끼쳐와 눈살이 다 찌푸려졌다. 그리고 덩달아 성종은 눈을 들어 내 얼굴을 확인하고 조금은 실망한 표정이 되어 축 처진 어깨를 하고 뒤돌아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분명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을 거란 뻔한 생각에 섭섭함도 잠시 내가 그럴 군번이나 되나 싶어 스스로가 미워졌다. 나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물다 망설이던 발을 옮겼다.

집안은 이미 코에 익숙해져 버린 알코올 냄새가 가득했고, 거실 바닥엔 맥주 캔과 소주병이 즐비해 있었다. 구겨진 캔들을 하나하나 따라 보다 피아노 다리 앞에서 눈이 멈췄다. 흰 그랜드 피아노가 거실 한 켠에 자리 잡고 있었다.


“선배, 커피 드릴까요?”


힘없는 목소리가 귓전을 매웠다. 나는 성종에게로 시선을 옮겼다가 대답 없이 피아노가 있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터벅터벅 걸어가 의자에 앉자 성종이 가까이 다가왔다. 여전히 슬픈 것들 외엔 표정이 없을 그 얼굴을 바라보는 건 용기가 나지 않아서 성종을 보진 못하고 그저 건반 위로 손을 올렸다.

 

 

나도 어렸을 땐 피아노 잘 쳤었는데. 성종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내가 중얼거리듯 뱉은 말에 성종이 정말요?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실력 한 번 보자며 연주를 해달라는 성종에 못 이겨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렸다. 피아노는 초등학교 다닐 때 배웠었고, 고등학교 때 밴드를 하며 가끔 두드려 본 게 전부였다. 악기를 다루는 것보단 노래를 하는 게 내게 맞는다 생각했기 때문에 피아노나 기타 다른 악기를 더 배워야겠단 생각은 없었다. 어릴 적 배웠던 것들은 기억에 잘 남아있는 게 별로 없었고, 고등학생 때 그저 피아노를 치며 연주하면 멋있을 거란 생각에 연습했던 게 떠올랐다.

내 연주가 끝나자 성종이 꼭 저를 닮은 귀여운 손짓으로 박수를 쳤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 뒷머리를 긁었다.


“선배는 어떻게 피아노도 잘 쳐요?”


해사하게 웃는 성종의 표정이 예뻐서 나도 그냥 웃어버렸다.

 

 

위로를 해주고 싶은데 위로하는 방법을 몰랐다. 나는 그런 복잡한 것들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피아노였고, 성종과 성종의 사람이 사랑했던 것이 피아노였다. 나도 모르게 성종의 집으로 온 것처럼 나도 모르게 어떤 곡을 연주했다. 상처 받은 누군가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어야겠다는 생각보다도 그저 오늘의 성종일 마주하고 떠오르는 대로 손가락을 움직인 것이었다. 연주를 마치고야 바라본 성종은 이미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히 일어나 성종에게 다가가 얇은 어깨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내 손가락이 띄엄띄엄 골라 누른, 몇 번을 틀렸지만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아 번복하여 연주하지 못한 곡은, 다름 아닌 성종이 그 언젠가 제 사람에게 줄 생일 선물이라며 들려준 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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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쫑홈에서 익명의 복이가 남겨준 떡밥 물어서 쓴 굉~장히 짧은 글.
그 복이가 영감 받은 노래가 "희열이가 준 선물" 이었다. 그래서 제목은 그거에 따라 성종이에게 준 선물.
윤종신이 이별 하고 힘들어 할 때 유희열이 즉석으로 쳐준 곡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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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o_s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