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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4.23 [쫑총/규쫑/현쫑/엘성] 울타리 下 - 9

 

울타리

 

 

 

가진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던 어린 우리. 말과 행동으로 모든 걸 드러내야만 하는 병에 걸렸던, 감추거나 간직하는 걸 몰랐던 치기어린 우리. 그 시절의 나는 나를 충분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서로의 가슴 속에 누군가 한 사람쯤은 지독한 암 덩어리처럼 키우고 있었던 시절. 김명수에게선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사랑이란 걸 배웠고, 남우현에게선 서로의 불행을 온전히 이해해 주는 것만으로도 사랑이라고 배웠다.

 

 

 

울타리 下 - 9

 

 

 

매일 꾸준히 도착하는 우현의 연락. 맛집을 찾아 가기도, 쇼핑을 하기도 하는 우현과의 주말. 종종 함께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성열 그리고 명수와의 약속. 일주일에 두어 번은 꼬박 명수와 함께 보내는 밤. 같은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변함없이 찾아가는 남자의 집. 언젠가부터 그것은 성종에게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되어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평일도, 친구들과 함께 보내는 주말도, 일주일 중 단 하루도 혼자 ‘가만히’ 있었던 날이 없는 몇 주가 속절없이 흘렀다.

 

어떤 날은 평화가 두렵기도 했다. 아픈 일, 슬픈 일, 괴로운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 고요하고 안온한 평화가 이상하리만치 무서웠다. 연우의 기억 속에서 살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게 불과 얼마 전이었는데, 이렇게 살다간 연우를 잊어버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런 걱정 속에서 살게 되었다.

 

영어 공부를 하던 어느 주말에는 그런 이야기를 남자에게 꺼내놓았다.

 

 

“아저씨. 연우는… 세상을 떠나기로 선택하던 그 순간에, 저에 대한 생각을 했을까요?”

“……”

“저는 지금 발가벗겨진 채로 세상에 나와 있는 느낌이에요. 저의 과거를 다 알고 있는 우현이와 명수 곁에서 옷 하나 걸치지 않고 저를 다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요.”

“……”

“연우는 알까요? 남겨진 사람은 어떤 기분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성종아.”

“네….”

 

 

책에만 향하고 있던 눈을 들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흰 손으로 건조한 앞머리를 쓸어 넘기던 그는 다른 한 손에 들고 있던 얇고 넓은 책을 내려놓고 컵을 들었다. 커피를 두 모금 마신 후에야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면 너는 무얼 가지고 갈래?”

“……”

“내가 보기엔 연우가 너를 가지고 간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

“그러니 너는 연우를 선택하지 않아도 좋다고…. 난 생각한단다.”

 

 

그 말을 들으면서는 또 울었다. 우는 일을 이제는 그만하고 싶다고 아주 오랜 시간을 생각해왔는데.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언젠가는 오롯이 연우 때문에 울었다면, 어느샌가 부터는 이 남자가 말하는 연우 때문에 울음이 났다.

 

연우가 나를 가져갔다는 말은, 연우는 나의 행복을 위해 과거의 이성종을 가져갔다는 말일까. 연우는 무얼 위해, 누굴 위해 죽은 걸까.

 

 

 

*

 

 

 

며칠 동안 남자의 그 말만 생각했다. 성종아,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면 넌 무얼 가지고 갈래? 그 말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어서, 우현이 내려왔던 날 무심코 물었다.

 

 

“우현아,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면 넌 무얼 가지고 가고 싶어?”

“세상의 마지막 날?”

 

 

이 질문을 우현에게 해도 되는 건가, 싶은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이미 뱉은 말을 도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더니 우현은 입을 꾹 다물고 뭔가 골몰히 생각했다.

 

 

“성종이 넌?”

“나는 잘 모르겠어.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그런데 갑자기 왜 세상의 마지막 날이야?”

 

 

우현의 그 질문엔 쉽사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는 건, 연우만이 겪어봤기 때문에 연우만 아는 것이었다. 죽음의 가까이에도 가본 적이 없는 우현과 성종은 그 날이 언제인지, 오기는 하는 건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그런 성종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우현은 예상 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연우는… 마지막 날 무얼 가지고 갔을까, 성종아.”

“……”

 

 

얼마 전 새로 생긴 근처의 만화카페에서 만화책을 잔뜩 빌려와 보던 중이었다. 성종이 먼저 한 권을 읽으면 우현이 그걸 받아 읽고 있었다. 스무 권이 넘게 빌려온 그걸 하루 동안 다 읽겠다는 각오를 한 지 반나절이 훨씬 지났고, 이제 막 그 분량의 반을 넘긴 상태였다. 우현이 만화책을 펼친 채 엎어놓고 다시 생각에 빠지는 것처럼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있지, 성종아.”

“…응.”

“연우가 그랬어, 소원이라면서… 사랑한다고 전해달라고. 성종이 네가 꼭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응.”

“나는 줄곧 내가 너를 그렇게나 찾아다닌 이유가, 연우의 그 말 때문이라고 생각했어.”

“……”

“근데 연우가 이런 말도 했어, 자길 좋아해줘서 고맙다고.”

 

 

우현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지독하게 숙연했다. 연우에 대한 추모라도 하는 사람처럼 우현은 길게 눈을 감았다. 우현이 다음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연우를 추억하는 지금의 우현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성종 자신을 만나면 우현 역시도 연우의 생각 때문에 슬프다는 것을.

 

 

“나 요즘은 좀 알 것 같아. 연우가 했던 말도, 내가 너를 그렇게나 찾으려고 했던 이유도.”

“그게 뭔데?”

“연우를 좋아했나봐, 내가.”

“……”

 

 

우현이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보며 우현의 얼굴에 연우의 얼굴을 겹쳐 떠올려보았다. 그걸 너는 이제야 알았구나, 우현아.

 

 

“그리고 연우는 내가 자길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나봐.”

“……”

 

 

지난날 술에 취해 연우를 좋아했었다고 고백하던 우현의 말이 기억 저편에서 돋아났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현은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른 척 했던 건 아닐까. 그 마음을 깨닫는 게 무서웠던 건 아닐까. 좋아하는 사람이 눈앞에서 죽어버리는 일… 그런 일은 누구라도 겪고 싶지 않을 테니까.

 

 

“성종아.”

“응.”

“연우는, 연우의 세상 마지막 날, 성종이 널 데려가지 않았을까.”

“…뭐?”

 

 

턱을 괴고 한참동안 우현의 얼굴을 안쓰럽게 보며 그의 말을 듣던 중이었다.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지 못 해서, 인정해 버리면 더 끔찍하게 슬퍼질 거란 걸 알아서, 지레 겁먹고 스스로의 내면에서도 감춰버렸던 걸 깨달은 우현을, 그저 안타깝고 가엽게 여기던 중이었다. 그런데 우현이 꺼낸 그 말에는 갑자기 모든 사고가 정지해 움직이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우현아. 우현아, 너. 너 왜 그 사람이랑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연우는 성종이 네 인생의 가장 큰 오점을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건지도 몰라.”

“……”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너의 행복을 빌었겠지?”

“……”

“어쩌면 연우는 자신 때문에 성종이 네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어.”

“……”

“그래서 연우 자신과 함께였던 이성종이란 사람을 데려간 게 아닐까.”

 

 

우현이 눈물을 흘렸다. 제 눈물이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는지 눈물을 흘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웃으면서도 우현은 계속 울었다.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며 계속, 계속 울었다.

 

 

“미안해, 성종아. 내가, 내가 뭐라고, 이런 얘길….”

“……”

“근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뱉으며 다시 말을 하는 우현의 목소리가 무척 떨고 있었다. 지금의 우현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서… 몰라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우현은 양 손바닥에 두 눈을 묻고 시야를 가린 채 말을 이어갔다.

 

 

“대신 연우는…, 연우는,”

“……”

“나한테 자기를 남겨놓고 갔잖아….”

“……”

“그래서, 그래서 내가, 널 다시 찾게 했잖아.”

“……”

“연우는, 나한테 자기 자신을 남겨놓고 가서, 내가 널 다시 만날 수밖에 없게 했잖아.”

“……”

 

 

우현이 크게 울었다. 울음소리까지 내며 서럽게 울었다. 성종은 덩달아 나오려는 눈물을 참아보려고 고개를 꺾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우현의 울음소리가 좁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성종아, 나는,”

“……”

“너를 다시 만나서 알았어.”

“……”

“내가, 연우를, 좋아했다는 걸.”

 

 

그 말을 마치며 우현은 또 엉엉 소리 내 울었다. 성종의 눈꼬리에서도 눈물이 비죽 흘렀다. 그래도 울음을 참아보겠노라고 입술을 꾹 물었다. 표정이 자꾸 일그러지는 걸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위를 향했던 고개를 수그렸다. 바닥을 보고 한참을 눈물만 떨어트렸다. 우현은 오랫동안 서글프게 울었다.

 

부친의 불륜을 결국 눈감아 줘야 했던 일과 갑작스런 가족의 불화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 받는 모친을 지켜봐야 했던 일. 그 모든 불행을 어린 날 한꺼번에 끌어안아야 했던 우현에게 또 다른 불행이 남아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상처 받고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며 끝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까지 지켜봐야 했던 일. 그런 우현의 불행은 세상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었다. 그리고 성종은 알 수 있었다, 그의 그 모든 불행을 알았고, 해결할 수도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자신이 남우현이란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우현 역시 성종 자신의 불행을 이해하기 때문에, 제 불행보다 남의 불행이 더 크고 아프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긴 시간을 돌아 지금에 와 있다는 것을.

 

 

“나는, 나는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면,”

 

 

우현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꺼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기가 힘에 부쳤다. 목소리마저도 곧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고 아프게 들렸다.

 

 

“나에게 남은, 연우를, 가져갈 거야.”

“……”

“나를 통해서 연우는, 너를 다시 만났으니까, 성종아.”

“……”

“내가, 내가 세상에 남아있는 연우를, 가져가야지. 그래야 돼, 나는.”

 

 

울컥, 울컥 치솟던 울음이 결국 목구멍 밖으로 터져나갔다. 더 이상은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성종은 목을 놓아 울었다. 두 사람의 울음소리가 한참을 성종의 방에 머물렀다.

 

연우야,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면 난 무얼 가지고 가야 할까?

 

 

 

*

 

 

 

곧 또 장마가 오려는지 공기가 습했다. 계절이 변화하는 것을 몸으로 잘 느끼는 편이었다. 특히 비가 올 것 같은 날은 습한 공기 때문에 더욱이 그랬고, 당연히 장마철이 오려하면 그 습한 대기를 가장 먼저 인지하는 사람은 내가 아닐까, 라고 성종은 항상 생각했다.

 

두 달 전, 그 달이 끝나갈 즈음에 남자에게 선물했던 건 찻잔 세트였다. 늘 고급스럽고 편한 차림으로 집에 있어도 세련된 그에게 어울리는 걸 찾고 싶어서 가본 적도 없는 백화점이란 곳에 방문해서 구입한 거였다. 그게 정말 좋은 건지, 그 가격이 합당한 건지는 몰라도 적당히 비싸고 보기에 예쁜 걸 골랐다. 선물이 마음에 드는지 들지 않는지도 모르겠는 무표정으로 그걸 받아든 남자는 고맙다는 한 마디를 했고, 성종은 어색하게 생일을 축하한다는 말을 전했다. 그 날 이후로 남자는 매일 그 잔에 커피나 차를 마셨다. 선물이 아주 쓸모없는 건 아니게 됐다는 안도감으로 성종은 그가 따뜻한 음료를 천천히 마시는 걸 구경했다. 그것은, 평일 밤에는 차였고 주말 낮에는 커피였다.

 

그 날 밤은 2년 만에 처음으로 남자의 집에 가면 안 될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의문이 든 날이었다. 아파트 단지 안 공터의 벤치에서 우연히 만난 명수 때문이었다. 집에 손님이 왔는데 하도 요란해서 밖에 나왔다는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냥 집에 돌아갔어야 했을 지도 몰랐다. 모레 오렴 혹은 내일 오렴, 늘 남자의 그 말에 줄곧 따라왔던 지라 그 날도 어김없이 평범한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좋은 꼴은 못 볼 걸, 그렇게 말하는 명수를 등지고 아파트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따라올 줄 알았던 명수는 한숨을 내쉴 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습한 공기만큼이나 불안했다. 불안의 원인도 모르면서 그것이 자꾸 커져만 가는 것 같아서 더 불안했다. 그리고 그 불안의 종착지에 도착했을 때, 현관문을 열자마자 들은 말은 ‘이혼하자’였다. 남자의 방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들을 신발도 벗지 않고 현관 앞에 서서 잠자코 듣고 있었다.

 

 

“뭐라고 했어?”

“이혼 하자고.”

“너 진짜 말 쉽게 한다.”

“결혼은 쉽게 했잖아. 이혼이라고 뭐 어려운 일은 아니지.”

“너 고작 SK 주식 좀 떨어졌다고 그래?”

“고작? 고작 주식? 넌 네가 했던 말이 너에게 그대로 돌아올 거라 건 생각도 않는구나.”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똑바로 말 해.”

“이 집에 왔던 남자애를 보고 그랬지, 네가. 네 얼굴에 먹칠할 지도 모르고, 너희 아버지 얼굴에 먹칠할 지도 모른다고. 조심하라고.”

“그것 때문에 이혼 하자는 거야?”

“그런 말을 뱉었으면 네가 한 말에 책임은 져야지. 어차피 사업 때문에 한 결혼인데, 사업에 도움이 안 되게 생겼으니 이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야.”

“변호사 선임 하겠다고 했잖아! 기자 회견도 하겠다고!”

“변호사 선임은 내가 하고 싶어. 너 때문에 입은 피해가 벌써 얼만 줄 아니?”

“아빠한테 얘기할게. 할 수 있는 한 그 피해 다 매워 달라 하면 되잖아.”

“어린애 같은 소리 그만하고 가라. 서류는 사람 시켜서 보낼게.”

“야, 김성규!!!”

 

 

그 때…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날카롭게 찢어지는 여자의 목소리와 함께 유리가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놀라운 소리를 성종은 처음 들었다. 남자가 소리를 쳤다….

 

 

“뭐 하는 짓이야!!!”

 

 

잠시 이어지는 그 침묵으로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곧 여자의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깟 싸구려 컵이 뭐라고 꼴사납게….”

“……”

 

 

아무 말이 없는 남자가 궁금했다. 무얼 하고 있는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왜 아무 말도 없는지. 그가 그렇게 큰 목소리를 내는 걸, 누군가에게 소리를 지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크게 화를 낸 그는 지금 어떤지, 궁금했다.

 

 

“엄청 귀한 거라도 되니, 그게? 소중한 사람이 선물이라도 해줬어?”

“……”

“하…, 설마 그 애가 사준 건 아니지?”

“나가.”

“김성규, 너 발에서 피 나, 지금. 근데 그깟 컵이 중요해?”

“나가라고!”

 

 

남자가 또 조금 큰 소리를 냈다. 그리고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듯한 짝! 그런 소리가 났다. 볼 수 없어서 그게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쩌면 누군가 상대를 때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김성규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일까. 알 수 없는 그 상황을 파악해보려 방황하는 사이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쳤구나, 너…. 그래, 이혼 해. 갈 때까지 가보자, 한 번.”

 

 

그 목소리를 끝으로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현관 앞에 당황한 채로 서 있던 성종은 그대로 하윤주, 그 여자와 마주쳐야만 했다. 방에서 나오자마자 성종을 발견한 여자는 걸음을 주춤거렸지만 다시 성큼성큼 현관으로 걸어왔다. 그 여자가 어떤 말이라도 할까봐, 어떤 행동이라도 할까봐 무섭고 두려웠던 것도 잠시. 여자는 성종의 코앞에서 신발을 대충 걸쳐 신고 씨발, 그런 욕지기 한 마디를 남기고 곧바로 나가버렸다.

 

등 뒤로 큰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에 몸이 조금 떨리는 것 같았다. 손도 발도 떨고 있었다. 어렵게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가 남자의 방문 앞에 섰다.

 

 

“아저씨….”

 

 

남자는 바닥에 쪼그려 앉아 깨진 유리 조각을 맨손으로 주워 모으고 있었다. 대충 흘겨봐도 그 조각들은 성종이 선물한 찻잔 중 하나였다. 파편들 사이로 피가 보였다. 남자가 성종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바닥의 파편들을 바라보며 손을 움직였다.

 

 

“왔니.”

“아저씨, 피 나요.”

“미안하다.”

“……”

“이렇게 깨버리면 안 되는 거였는데.”

 

 

큰 조각들을 바닥 한 군데에 모아둔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그의 발목 언저리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는 게 확연히 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성종은 오래 전 연우가 아팠을 때처럼 어찌할 줄 몰라 방황하던 자신을 다시 발견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사용하지 말고 그냥 간직할 걸 그,”

 

 

발바닥에 작은 유리조각들이 밟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냥 무작정 남자의 품으로 달려들어 그의 목에 팔을 감아 껴안았다. 하던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한 그가 결국은 말 대신 그런 성종의 등을 양손으로 토닥여주었다.

 

 

“저는 괜찮아요, 아저씨.”

“……”

“아저씨는 괜찮으세요?”

 

 

남자는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성종은 돌아오지 않는 대답도 그런대로 괜찮은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화나신 것 같아서요.”

“미안하다.”

“저는 괜찮아요.”

 

 

남자의 목을 감았던 팔을 풀어내고 그 품에서 빠져나왔다. 책상 위에서 화장지를 몇 장 뽑아내 무릎을 굽혀 바닥에 앉았다. 남자의 발목에 난 상처 주위의 피를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혹여나 상처에 닿아 아플까봐 화장지를 접고 접어 그 끝으로 천천히 발목 언저리를 건드렸다.

 

 

“아저씨, 저 궁금한 게 있어요.”

 

 

손을 거두고 앉은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지금의 이 남자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지금의 이 남자의 얼굴을 바로 볼 자신이 없어서였다.

 

 

“저 분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셨죠.”

“그랬지.”

“사랑은… 뭐예요?”

 

 

침묵이 꽤 길어졌다. 쪼그려 앉은 자세가 불편해 결국 성종은 몸을 일으켰고, 평소처럼 침대로 걸어가 앉았다. 의자에 앉은 남자는 책상 서랍을 열어 연고와 반창고를 꺼냈다. 그가 상처가 난 부위에 연고를 바르고 반창고를 뜯어내 붙이는 걸 성종은 마냥 지켜만 보았다. 그리고 한참 만에 남자가 대답을 했다.

 

 

“글쎄다.”

“……”

“진중하게 생각하기엔 너무 어렵지.”

“……”

“그렇다고 그냥 살 비비대고 웃음 나는 게 사랑이지, 라고 해버리면 좀 가볍잖아.”

“…네.”

“그래서 지배하는 게 사랑하는 것보다 편하다고들 하지.”

 

 

남자는 성종의 얼굴 대신 바닥에 모아놓은 유리 조각들을 내려다보았다. 성종은 그런 그를 보았다. 또 한참 만에 이번엔 성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현인 연우를 사랑했을까요.”

 

 

그 말을 들었음에도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성종 역시 특별한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이번엔 남자의 다친 발목을 바라보았다. 멎지 않은 피가 반창고 표면으로 빨갛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저를 좋아했던 명수는 사랑이었을까요.”

“……”

“아저씨는…,”

“……”

“저를 사랑해서 지배했던 건가요?”

 

 

남자의 말을 따라 ‘지배’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그렇게 말해놓고 보니 그 표현은 전혀 아니란 걸 스스로 깨달았다. 지배한다는 건 자기 의사대로 복종하게 하여 다스린다는 의미이니까. 그런데 이 남자는 그랬던 건 아니니까. 그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말을 이 남자에게 갖다 붙이기에, 성종은 오히려 그에게 긍정적인 마음만 갖고 있었다.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역시 성종을 바라보았고 네 개의 눈이 어지럽지 않고 곧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 모두 아무런 표정이 없었고, 그리고 더 이상의 대화도 없었다. 한참동안 서로를 쳐다만 보던 그들의 고요는 결국 성종에 의해 깨졌다.

 

 

“오늘은 이만 가볼게요.”

“……”

“저 모레 올까요?”

“그래. 모레 오렴.”

 

 

 

*

 

 

 

그 밤 이후로 성종의 머릿속은 쉴 틈 없이 소란스러웠다. 남자의 집에서 나오니 그 자리에서 그대로 기다리고 있던 모양인지 명수를 다시 마주했다. 명수는 많은 말 대신 휴대전화로 기사 몇 개의 목록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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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믿기지 않았지만 그건 영락없는 사실이었는지, 며칠 동안 기사가 물밀듯이 쏟아져 나왔고, 하윤주라는 이름은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에서 내려올 줄을 몰랐다. 덕분에 성종은 김성규라는 이름 역시 인터넷을 통해 쉽게 볼 수 있었고, 그제야 그가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지위를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어쨌든 그 일 때문에 남자는 자신의 명예 실추와 회사의 주가가 약간 하락하는 정도의 타격을 입었으며, 제 아내라는 사람에게 이혼을 통보한 것이었다.

 

그걸 본 그 날 이후 며칠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이혼 절차가 진행 중이라는 기사가 났다. 명수는 제 삼촌이 요 며칠 그 일로 엄청 히스테릭하다며, 신경질을 많이 내고, 짜증이 늘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니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아서, 남자를 찾아가는 날은 괜한 긴장을 하곤 했다. 그렇지만 명수의 말과는 다르게 남자는 항상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하고 침착했다. 별 볼 일 없는 성종의 일과를 귀 기울여 들어주었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영어 공부를 도와주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남자의 모습은 나쁘지 않아보여서 다행이라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남자의 집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날 밤이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10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고, 낮에 비가 한바탕 온 탓에 땅이 축축이 젖어있었다. 터덜터덜 걷는 걸음 끝에서 낡은 빌라 앞에 쪼그려 앉아있는 명수를 발견했다.

 

 

“이제 끝났냐.”

“여기서 뭐해.”

“네가 봐야 될 게 또 있어서.”

 

 

의미심장한 그 말을 몇 번 곱씹으며 그가 들이미는 휴대전화의 네모난 화면을 보았다. 이번에도 저번처럼 기사 몇 개의 목록이었는데….

 

 

“뭐, 뭐야, 이게?”

“하윤주가 빡쳐서 이딴 기사 냈나봐.”

“뭐…?”

“연예계에서 매장 당하고, 이혼 당하고, 회사 이름에 먹칠까지 하고. 정신 나갈만하지.”

“그, 하, 하윤주라는 사람이 이런 기사를 냈다고?”

“그 여자 말고 너 우리 삼촌네 왔다 갔다 하는 거 아는 사람 없잖아.”

“……”

“설마 내가 이딴 짓 했겠냐.”

 

 

길을 잃은 정신을 붙잡아 보려고 명수가 보여준 전화기의 화면을 다시 쳐다보았다. 말도 안 되는 글자들이 그 안에 가득 쓰여 있었다. 몇 번을 읽고 또 읽어봐도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명수의 얼굴을 멍청하게 쳐다보다가 또 휴대전화 화면을 쳐다보는 그런 짓을 반복했다.

 

SK그룹 김성규, 미성년자와 원조교제….

하윤주 바람났던 이유, 남편의 내연남 때문….

SK그룹, 김성규 원조교제 논란으로 주가 폭락….

 

얼핏 몇 줄 보이는 기사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SK그룹 김성규는 사업 때문에 하윤주와 결혼 했으며 사실은 남자를 좋아하는 취향이고, 지금도 고등학생인 미성년자 소년과 함께 거주 중이다. 교제의 바탕에는 금전적 지원이 있으며, 소년은 고아이고 돈을 목적으로 김성규를 만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사의 어느 부분들을 보다가 정신이 아득해져 오는 것 같아서 숨을 크게, 가쁘게 쉬었다. 괜찮으냐고 묻는 명수의 말에 대꾸를 할 여유도 없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아니라고, 아저씨 그런 사람 아니라고, 난 아저씨에게 도움을 받을 뿐이지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좋은 걸까. 왜 이런 상황에 대처 하는 법은 지금껏 학교에서도 가르쳐 주지 않은 거지? 할 수만 있다면 김성규, 그 사람에게 당장에 달려가 묻고 싶었다.

 

아저씨, 이럴 땐 어떻게 해요? 아저씬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저는 어떻게 하면 좋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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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타리 하편을 쓰면서 저는 정말... 많이 울었네요. 흡연량도 거의 두 배로 늘었어요.

울타리 연재 중 언젠가 여러분의 사랑은 무엇인가요, 라고 물었던 기억이 있어요. 부끄럽지만 울타리는 제가 겪었던 몇 차례의 사랑을 통해 배운 것들의 집합체예요. 물론 저는 그걸 아는 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고, 픽션 속 성종이의 나이인 열여덟, 스물에는 당연히 알지 못했죠. 성종이가 명수 우현일 통해 배운 사랑도, 성규를 통해 배운 삶도 모두 제가 지난 시간을 통해 배운 것들이라, 저의 과거를 짚어보며 괴롭기도 했답니다... 울타리 상편이 하편을 위해 존재했던 것에 불과했던 점도, 제가 정말 쓰고 싶었던 건 하편이었던 점도 그런 이유였을 거예요. 주인공들이 겪는 아픔에 함께 안타까워하고 슬퍼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글을 쓰는 저야 말로 성종이 그 자체가 되었었고..., 남겨주신 댓글들로 위로를 받았던 것도 저였어요. 여러분이 계셨기 때문에 울타리도, 울타리를 연재하는 저도 있을 수 있었어요.

 

매편마다 코멘트가 길어집니다... 이런 이야기는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께가 아니라면 할 수가 없어서요. 소설도 소설이지만, 연재하는 동안 함께 해주신 분들과 소통할 수 있어 행복했어요.

 

다음 편에서 뵐게요. 감사합니다.

 

 

 

 

Posted by Jo_s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