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표지는 인피니트 팬픽카페 리미트리스의 세인님께서 수고해 주셨어요. 넘 감사드립니다.

 

 

 

 

 

울타리

 

 

 

가진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던 어린 우리. 말과 행동으로 모든 걸 드러내야만 하는 병에 걸렸던, 감추거나 간직하는 걸 몰랐던 치기어린 우리. 그 시절의 나는 나를 충분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서로의 가슴 속에 누군가 한 사람쯤은 지독한 암 덩어리처럼 키우고 있었던 시절. 김명수에게선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사랑이란 걸 배웠고, 남우현에게선 서로의 불행을 온전히 이해해 주는 것만으로도 사랑이라고 배웠다.

 

 

 

울타리 下 - 6

 

 

 

“언제까지 따라올 거야?”

 

 

울음을 다 그치고 감정을 좀 추스르고 나서 그 집에서 나왔다. 야, 야, 라고 부르며 졸졸 쫓아오는 명수가 신경 쓰여 정류장을 지나친 지는 오래였다. 이대로 걸어가면 앞으로 족히 20분은 걸릴 터였다. 흐린 날씨 덕에 좀 습했지만 선선한 밤공기가 차갑지 않고 부드러워서 그냥 걸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졌다. 이미 10이 넘게 걷기도 했고. 뒤를 돌아보며 언제까지 따라올 거냐고 묻는 물음을 듣고 나서야 몇 걸음 뒤에서 걷고 있던 명수가 성큼성큼 바로 옆으로 다가왔다.

 

 

“어디 가는데.”

“집.”

“집은 어딘데.”

“좀 더 걸어야 돼.”

“그럼 버스를 타면 되지, 바보야.”

“내 맘이야. 너나 집에 돌아가.”

“데려다 줄게.”

 

 

애정이 깃든 말도 여전히 무심하게 내뱉는 명수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란해진 걸음이 어색했다. 어제 아침에 우현과 걸을 때도 그랬다. 누군가와 나란히 걷는 일,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동안 어디서 뭐하고 살았냐.”

“……”

“왜 말이 없어.”

“너는?”

 

 

그냥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주머니에 양 손을 찔러 넣고 터벅터벅 걷던 명수는 자신에게로 돌아온 질문에 음- 이라며 잠깐 생각에 빠진 듯 했다.

 

 

“나야, 뭐… 똑같았지. 그냥,”

“성열이는?”

 

 

뭔가 더 말하려는 명수의 말을 끊고 성열이는, 이라고 또 물으니 그가 눈을 뾰족하게 뜨고 노려봐왔다. 성열이라…. 아주 오랜만에 불러보는 이름이었다. 그동안 우현이나 명수와 같은 이름을 완전히 잊고 살 수는 없었지만, 성열이란 이름은 꽤 오랫동안 떠올린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야, 성종이. 항상 그렇게 불러주던, 아무리 무시하고 외면해도 끝까지 다가와 주던 그 애는 잘 지내고 있을까.

 

 

“성열이 여기 있어.”

“응?”

“병신새끼, 공부도 지지리도 못 해서 간신히 지방에 무슨 꼴통 대학 들어갔다는 거야.”

“성열이 얘기 맞아? 네 얘기 아니고?”

“야! 나랑 걔랑 비교 하지 마.”

“아아- 너는 공부를 지지리도 못 한 수준은 아니었지?”

“그렇지. 나는,”

“진짜 좆같이 못 했지. 김명수는.”

 

 

왠지 낯설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장난을 좀 치니 발끈해서는 목소리가 커지고, 얼굴 표정이 확확 바뀌는 명수를 보며, 킥킥 웃고 있는 자신을 인지한 순간. 성종은 잊고 살았던 뭔가가 기억 저편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 같다고 느꼈다. 지난 주말 밤 우현과 라면에 소주를 놓고 먹을 때에도, 그리고 지금 명수와의 이 짧은 대화를 하면서도. 왜 웃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자연스럽게 연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연우 앞에서가 아니라면 잘 웃지도 못 했던 지난날의 이성종은, 연우를 떠나보낸 지금 이렇게 웃어도 되는 걸까. 그것도 연우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의 앞에서…. 그리고 연우가 세상을 떠난 가장 큰 원인이었던 ‘이성종의 도망’의 시간 동안 곁에 있어주었던 또 다른 사람의 앞에서….

 

 

“그래서, 성열이는?”

“같은 학교 다녀. 학교 근처에서 자취 해, 걔는.”

“그렇구나.”

“이성열 보고 싶냐.”

“성열이? 음, 보고 싶지.”

“그럼 주말에 술 한 잔 같이 하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성열을 보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딱히 없어서. 그렇지만 보고 싶지 않다는 말은 왠지 하고 싶지 않았다. 성열이까지 만나게 될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아니, 사실 우현과 명수를 이렇게 한꺼번에 만나게 될 거라고도 생각 못 했었지. 열여덟, 그 당시 성종을 이루었던 연우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고작 며칠 만에 몽땅 나타나 버렸다.

 

 

“…나는?”

“너, 뭐?”

“나는… 안 보고 싶었냐.”

 

 

조금 머뭇거리다 툭 상냥하지 않게 뱉어진 명수의 말에 성종은 고개를 돌리고 살짝 웃었다.

 

 

“넌? 넌 나 보고 싶었어?”

 

 

대답 대신 또 되물으니 명수가 걷던 걸음을 멈추지 않는 채로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를 따라 얼굴을 들었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보고 있노라니 오늘 밤부터 비가 올 거라던 일기예보가 떠올랐다. 별은커녕 달도 보이지 않는 하늘을 유심히 보던 명수가 다시 얼굴을 정면으로 향했다. 성종은 그런 명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걸었다.

 

 

“아니.”

“그럼 나도 아니.”

 

 

칫, 그런 소리를 내던 명수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너 사라지고 나서 남우현한테 너 어디 있냐고 물었었는데.”

“……”

“걔가 모른다고 해서 좀… 팼어.”

“뭐?”

“아니…, 분명 남우현네 집에서 살았잖아, 너. 근데 걔가 모른다고 하니까 빡쳐서. 윽!”

 

 

우현을 때렸다는 말에 왠지 못마땅해져서 가벼운 주먹을 명수의 배에 꽂았다. 별로 세게 때리지도 않았는데 명수는 걸음을 멈춘 채 양 팔로 배를 감싸고 허리를 구부렸다. 곧게 뻗어 들어 올린 다리의 종아리로 명수의 엉덩이를 찼다. 당연히 힘을 주고 찬 건 아니라 명수는 그냥 몸이 살짝 흔들리며 몇 걸음 앞으로 전진 했을 뿐 별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

 

 

“아, 왜 때려!”

“야!”

“왜!”

“네가 뭔데 우현일 때려!”

“남우현은 너한테 뭔데!”

 

 

갑자기 복부와 엉덩이를 맞은 명수가 발끈했는지 조금 큰 소리를 냈다. 그런 그를 잠깐 노려봐 주다가 걷던 길을 마저 걷기 시작했다. 남우현이 나에게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고, 2년여 만에 다시 만난 우현이 내게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어떤 존재가 될지 지금으로썬 전혀 알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왠지 우현을 때렸다는 명수가 너무 얄밉고 괘씸해서, 쫄랑쫄랑 다시 쫓아오는 명수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한 대 더 때려주었다.

 

 

“우현이 때린 거, 지금 내가 복수하는 거야.”

 

 

명수의 가슴에 닿았던 주먹을 떼어냈다가 한 대를 더 때려줄 요량으로 다시 팔에 힘을 주었는데, 명수의 손바닥이 성종의 꼭 쥔 주먹을 감싸 쥐며 막았다.

 

 

“어차피 나 못 이길 거 알면서 왜 자꾸 덤벼, 이성종.”

“어차피 나한테 져줄 거잖아, 너.”

 

 

다시 다리를 들어 올려 종아리로 명수의 허벅지를 퍽, 소리가 나게 쳐버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명수를 등지고 걷기 시작했다. 야! 이씨! 짜증을 내다가도 금세 쫓아와 옆에서 군말 없이 걷는 명수를 보며 또, 조금, 웃음이 났다.

 

 

“남우현이랑 무슨 사인데.”

“아무 사이 아니야.”

“어쨌든 남우현 그 새끼랑 계속 알고 지내는 거지?”

“……”

“남우현 그 새끼가 나한테 거짓말 한 거 맞지?”

“아니야. 나 우현이한테서도 도망쳤는데. 우현이랑도 며칠 전에 다시 만났어.”

“뭐야, 걔는. 너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고?”

“……”

“야, 씨. 그러고 보니까 너 왜 여기 있냐.”

“…멍청이.”

 

 

일찍도 묻는다, 정말. 한심하단 표정으로 명수의 얼굴을 돌아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명수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진즉에 물었어야 할 질문들을 시작했다.

 

 

“삼촌이랑 무슨 사이야?”

“알아서 뭐하게.”

“네 삼촌 아니고 내 삼촌이잖아.”

“……”

“너 씨발, 삼촌이랑 원조교제 그딴 거 아니지?”

“그런 거면 어쩔 건데?”

“그 인간 깜빵에 쳐 넣어야지. 아, 네가 미성년자가 아니라 안 되나. 그럼 그냥 내가 족쳐야지.”

“내가 아저씨 건들지 말라고 아까 말했다.”

“뭐야, 진짜야? 진짜 삼촌이랑 그런, 그렇고 그런, 그런 거야?”

 

 

당황해서는 말을 더듬는 그에게 대답을 해주는 대신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한참 말이 없는 명수를 신경 쓰지 않고 계속 걸었다. 어느새 집 앞까지 다 와버려서 슬슬 명수를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한 골목에 들어서서 걸음을 멈추니 명수가 따라 멈췄다. 반지하 방이 있는 낡은 빌라가 몇 걸음 거리에 있었다. 주위엔 사람 하나 없었고, 곧 비라도 올 것처럼 공기가 잔뜩 습해진 상태였다.

 

 

“삼촌이, 돈, 주냐.”

“…응.”

“얼마나.”

“음. 많이.”

“얼마나 많이?”

“매번 달라. 일주일에 몇 십씩?”

“하, 돈 쓸 데도 존나 없다, 김성규.”

 

 

혼잣말처럼 제 삼촌이라는 남자의 욕을 중얼거리던 명수는 다시 운을 뗐다.

 

 

“돈 받고 넌 뭐… 뭐, 해주는데.”

“왜 그렇게 궁금한데.”

“야, 그 돈.”

“……”

“내가 줄 테니까 김성규 그 인간 만나지 마.”

“뭐?”

“김성규 만나지 말고 나 만나라고. 내가 돈 준다고.”

“너 돈은 그만큼 있고?”

“없어, 씨발. 삼촌한테 용돈 받아서 내가 너 주면 되잖아.”

 

 

명수의 말이 황당해서 코웃음소리가 났다. 결국 웃음을 참지 못 하고 낮게 소리를 내서 웃어버리니 명수가 왜 그렇게 웃느냔 듯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뭐가 웃긴데.”

“그냥 너 지금 하는 말이 웃기잖아.”

 

 

말을 하면서도 계속 웃었다. 웃겨서가 아니라 아마 명수가 귀엽다는 생각이 든 것 같았다.

 

 

“난 진심이라고.”

“아저씨, 나 보육원에 있었을 때부터 후원해주던 분이야. 그게 그냥 지금까지 이어진 거고. 나 우현이네서 도망쳐서 갈 곳 없을 때 아저씨 따라온 거야.”

“삼촌 착한 사람인 건 나도 아는데, 그래도 안 돼. 삼촌 만나지 마. 너 자꾸 김성규 만나면 내가 그 인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릴 거야.”

“왜. 왜 그렇게 아저씨 못 만나게 하는데.”

“삼촌, 게이야.”

 

 

불쑥 들어버린 그 단어에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가… 말았다. 왠지 알 것 같아서. 아니, 왠지 알고 있었던 것도 같아서. 그냥 어렴풋이.

 

 

“근데… 그게 왜?”

“그 인간이 너! …건들면 어떡해.”

“어떡하긴 뭘 어떡해.”

“……”

“아저씨는 나 건들면 안 돼?”

“뭔 소리야, 너.”

“넌 나 건드렸잖아.”

“그래서 뭐, 삼촌이 너 건들면 진짜 그 인간이랑, 뭐, 뭐라도 하려고?”

 

 

자꾸 말을 더듬는 명수의 모습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계속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 김명수.

 

너도, 갑자기 네 앞에 나타난 내가 놀랍겠지. 나도, 갑자기 네 앞에 나타난 내가 놀라워. 아주 잠깐은… 이렇게 너를 다시 만날 줄 알았다면 김성규라는 그 사람을 따라오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도 했고. 그 집에서 너를 마주쳤을 때 그냥 도망쳤어야 했던 건 아닌가 생각도 했어, 나는. 근데 이상하지. 우현이를 다시 만났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나는… 이제야 왠지 내가 살아있는 것 같아.

 

 

“아저씬 안 그럴 거야, 나한테. 너랑 다르거든.”

“야! 사람 그렇게 비교하지 말라고.”

“그리고, 너.”

“나, 나 뭐.”

“아저씨 욕하지 마. 나 2년 동안 아저씨 때문에 살 수 있었어. 아저씨 욕하기만 해봐. 가만 안 둘 거야, 내가.”

“야, 이성종. 너… 우리 삼촌 좋아하냐.”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비가 우수수 쏟아지기 시작했다. 명수의 마지막 물음에 대답하지 않을 절호의 기회였다. 그를 등지고 냅다 낡은 빌라 안으로 뛰었다. 유리문을 밀고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으려는데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돌아보았다. 김명수가 태연한 얼굴을 하곤 따라 들어와 있었다.

 

 

“왜 따라와.”

“비 오는데 그럼 쳐 맞고 있냐.”

“집에 가. 택시 타면 되잖아.”

“여기 사냐. 좀 쉬었다 가자.”

 

 

 

*

 

 

 

집에 막무가내로 들어온 명수를 어쩌지 못 하고 그냥 두었다. 집이 왜 이렇게 춥냐며 혼잣말을 하던 그는, 갑자기 쏟아진 비에 몸이 좀 젖은 게 찝찝했는지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 바닥에 훌훌 흘려놓고 속옷만 입은 채 욕실로 들어갔다. 참 김명수답다는 생각을 하다가 훅 끼쳐오는 한기에 춥기는 추운 것 같아서 매트리스 위 전기장판의 전원을 켰다. 외투를 벗어놓고 명수의 옷가지를 주워 방 한 편에 가지런히 두었다. 그리고 곧 욕실 문이 벌컥 열려서 돌아보니 젖은 알몸으로 물을 뚝뚝 흘리는 명수가 보였다.

 

 

“야, 칫솔 새 거 있냐.”

“찾아봐. 있을 걸.”

 

 

다시 닫힌 문을 쳐다보다가 지잉 울리는 전화기를 꺼냈다. 진동이 계속 울리는 게 왠지 전화가 온 것 같았다. 이 번호에 전화를 걸 몇 없는 사람을 머릿속에 떠올려보다가 휴대폰을 보니 우현이었다.

 

 

“여보세요.”

‘성종아.’

“응.”

‘알바 끝났어?’

“응.”

‘저녁은 먹었어?’

“응.”

 

 

응, 이라는 대답만 세 번째. 너는 어떤지 한 번쯤은 되물어 볼 법도 했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상대가 어떻게 대답을 하든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여전히 맑은 목소리로 재차 들려오는 우현에게 다시 귀를 기울였다.

 

 

‘여기 비 온다, 거기도 비 와?’

“응. 여기도.”

‘방 춥잖아. 따뜻하게 하고 자.’

“그래. 우현이 너도.”

 

 

우현이 뭔가 잠시 망설이는 듯 말이 없었다. 성종은 나라도 무슨 말을 더 해야 하나 싶어 머리를 굴리다가 다시 들려오는 그의 말에 잠시 고민했다.

 

 

‘나, 주말에 또 가도 돼?’

 

 

이번엔 응, 이라는 그 말이 왠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우현일 보면 자꾸 연우가 떠올랐다. 명수를 다시 마주했을 때보다 우현을 다시 마주했을 때의 고통과 괴로움이 훨씬 컸다. 연우의 가장 가까이에 있어주었던 남우현, 연우의 죽음을 지켜 본 남우현. 그런 우현일 이렇게 계속 곁에 둬도 되는 건가 싶은 고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일단 부딪혀 보는 거야. 무엇이 너를 위한 건지는 겪어봐야 알잖니. 그리고 또 그 남자의 말이 떠올랐다.

 

우현인 내가 또 도망쳐도 또 날 찾으려 할까. 내가 어디로 가든 날 찾아 따라올까. 날 떠나거나 버린 그 수많은 사람들과 다르게 날 떠나지 않은 우현이, 날 다시 찾아준 우현이. 우현아, 대체 무엇이 지금의 너를 만들었니. 대체 무엇이 지금의 네가 나를 다시 찾게 한 거야?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어.

 

 

“너 과제 같은 거 없어? 주말에 친구들 안 만나?”

‘과제 안 해도 돼. 친구들 학교에서 만나는데 뭐.’

“그래도….”

‘내 걱정 해주는 거야?’

“……”

‘괜찮아. 나는 지금 네가 더 중요해.’

 

 

그런 말을 하는 우현은 쑥스러운 사람처럼 헤헤, 웃었다. ‘중요해.’ 중요하다는 말은 무슨 의미더라. 성종은 지금껏 자신에게 중요했던 사람들을 떠올려보았다. 연우, 연우…, 연우. 온통 연우뿐인 그 끝에 어떤 남자의 얼굴이 잠깐 스쳐갔다. 김성규… 그 얼굴이 떠오르는 게 왠지 잘 납득이 가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도 없었다. 연우를 잃은 후의 삶은 그 남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 했으니까.

 

생각이 또 연우에게로 도달했다. 역시 우현을 생각하고, 우현을 곁에 두면서 연우를 떠올리지 않는 일은 가능할 수가 없었다. 우현의 웃는 얼굴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그 소리가 왠지 생생했다.

 

 

“우현아, 나….”

‘응.’

“널 만나면 연우가 생각 나. 그래서 힘들어. 슬프고….”

‘나도 그래, 성종아.’

“……”

‘나도 널 다시 만나니까 연우 생각 엄청 많이 나.’

“근데 왜 날 찾아왔어. 왜 또 오려고 해.”

‘나, 늘….’

 

 

우현의 목소리가 슬퍼져서 성종 역시 울적해졌다. 하늘이 울고 있어서 그런지 성종 역시 금방이라도 울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2년 동안 늘… 미안한 마음으로 살았어, 너한테. 연우한테….’

“……”

‘네가 그랬잖아, 연우에게 뭔가 되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거 하지 말라고.’

“……”

‘연우에게 어떤 감정도 갖지 말라고, 아무 것도 되지 말라고.’

“……”

‘근데 나 못 그랬거든. 연우에게 그때 어떤 감정을 가졌었는지도 모르고… 연우에게 내가 진짜 뭔가 되어주긴 했었는지도 모르겠어.’

 

 

우현이 연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지난 주말 밤이 생각났다. 술에 취해서는 연우를 좋아했다고 말한 우현의 말이 여전히 미궁 속에 남아있었다. 그때 그 말에 대해서 다시 물어보지도 못한 채 우현은 잠들었고, 다음 날에도 그에게 그것에 대해 다시 묻지 못했었다.

 

 

‘나 연우 위해서, 네 말처럼… 백 번, 천 번 죽어보려고 했는데 못 그랬거든.’

“왜 그런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미안해, 성종아.’

“……”

‘주말에 맛있는 거 먹자. 내가 쏠게.’

“…그래.”

 

 

또 배시시 웃는 소릴 내던 우현은 잘 자라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연우를 생각나게 하는 너를 곁에 두다보면 나는, 언젠가는 연우의 기억 속에서 살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야, 이성종.”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명수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털며 욕실에서 나온 명수가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다.

 

 

“왜 찬물밖에 안 나와. 얼어 뒤지는 줄 알았네.”

“아….”

 

 

전기로 온수를 사용하는 터라 온수기의 스위치를 켜야만 따뜻한 물이 나오는데. 그걸 잊고 있었다. 설명을 해줘야 하나 싶다가 그냥 말았다. 속옷만 입고 나온 명수는 으으, 추워, 따위의 말을 하며 옷을 주워 입는 대신 성종의 가까이로 터벅터벅 걸어왔다.

 

 

“오, 전기장판은 있네.”

 

 

그러더니 매트리스 위로 올라가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누웠다. 그의 태연한 행동에 어이가 없었다.

 

 

“자고 가도 되지?”

“집에 가. 좁잖아.”

“예전에도 같이 잘 잤잖아.”

 

 

그 말에 왠지 얼굴과 귀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서 앉았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등을 돌려버렸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 온수기를 켜고 욕실로 들어갔다. 보는 이 한 명 없는 데도 옷을 벗으니 부끄러운 기분에 휩싸였다. 사실 명수의 벗은 몸을 보았던 순간부터 계속 그랬다. 오래 전 알아버렸던 어떤 느낌과 기분이 자꾸만 떠올라서 몸이 이상해진 것 같았다.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부풀어 오른 아랫도리를 보고 있노라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씻고 나오니 명수는 그새 잠이 든 건지 방 안은 고요하고, 빗소리만 요란하게 들렸다. 방 한 쪽에 작게 나있는 창문밖엔, 어두운 세상에 비만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매트리스 가까이로 다가가 명수의 감긴 두 눈을 보다가 고민을 했다. 지금이라도 깨워서 억지로 집에 보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바닥에서 자야하는지. 김명수가 순순히 돌아갈 리도 없겠지만, 이렇게 쏟아지는 빗속에 그를 내쫓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바닥에서 자기엔 하나뿐인 이불은 김명수가 깔고 덮고 있었다. 또 한숨이 났다.

 

알람을 잘 맞췄는지 확인을 해보고, 결국 명수가 누워있는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이불을 턱 바로 아래까지 끌어당기고 천장을 보고 누워있었는데, 바로 옆에서 누가 움직이는 기척에 깬 건지 아님 애초에 자고 있지 않았는지 명수가 몸을 돌려 모로 누웠다. 고개를 슬쩍 돌려보니 눈을 게슴츠레 뜨고 성종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시야 안에 이상하게 그의 눈만 또렷이 보이는 것 같았다.

 

 

“오랜만이다.”

“응.”

“너, 다시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나도.”

 

 

낮고 무거운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명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오른쪽 몸만 신경이 바짝 서서 움찔 거리는 것 같았다. 성종은 그런 자신을 그가 눈치 채지 않기만 바랐다.

 

 

“이쪽으로 더 와봐.”

“지금도 충분히 가까워.”

“더 가까이 와봐.”

“왜 이래. 더 가까이 갈 곳도 없어.”

 

 

워낙 좁은 매트리스라 이미 많이 가까운 거리임에도 명수는 그렇게 말했다. 안 그래도 몸 구석구석이 간질거리는 것 같은데, 더 가까이 가면 안 될 것 같아서 눈을 꾹 감고 명수의 말을 무시했다. 그런데 순식간에 몸을 찰싹 붙여오며 오른 팔로 가슴을 감싸 안아오는 그의 행동에 다시 눈을 팟 떴다. 그럼 내가 가면 되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 있어서, 어쩐지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너, 너한테만 나는 냄새 있는 거 알아?”

“……”

“그 냄새 나, 지금 너한테.”

“……”

“2년 전이랑 똑같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옆얼굴에 이마를 부비적대는 통에 살에 닿는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몸이 너무 가깝고, 목소리가 너무 가까워서 불쑥불쑥 2년 전 어느 날들이 생각났다. 일주일 동안 밖에도 나가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명수의 집에서 보냈던 그 날들…. 눈을 뜨고 나서도, 눈을 감기 전에도 나눴던 키스와 섹스…. 갑자기 생경하게 생각난 그런 것들에 몸 이곳저곳이 반응했다. 너를 밀어내야 해. 나는 그 때처럼 너를 다시 원하게 되면 안 돼. 나는 너를, 너를.

 

누웠던 몸을 일으킨 명수가 성종의 몸 위로 상체를 올렸다. 성종은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예상이라도 했던 것처럼 스르르 눈을 감았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거짓말이야. 너 많이 보고 싶었어.”

“……”

“진짜, 다시 만나면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보고 싶었어.”

 

 

긴 키스가 이어졌다. 맞붙었던 입술이 열리고 그 사이로 침과 숨이 서로의 입 안으로 오갔다. 불쑥 명수의 혀가 입 안으로 들어와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성종의 혀를 휘감았다. 그렇게 한참 키스를 이어가던 명수가 몸을 일으켜 위에 올라탔을 때, 알았다. 아니, 결국 수긍해버렸다. 김명수를 계속… 원해왔다는 것을.

 

나는 너를 밀어내야 해. 다시 너를 원하게 되면 안 돼. 그런데, 그런데 나는 이미 너를 너무도 원하고 있는 걸.

 

밀어버렸다. 명수의 가슴에 손을 얹고 팔을 쭉 펼쳤다. 입술과 입술 사이로 침이 만든 긴 고리가 이어지다가 뚝 끊어졌다.

 

 

“알겠어, 안 할게.”

“……”

“근데 하나만 물어보자.”

“뭔데.”

“나 그때. 너 좋아한다고 말 했었잖아.”

“…응.”

“그리고 네가 그랬잖아. 네가 원하는 만큼 내 옆에 있을 수 있다면, 그동안엔 나를 좋아하겠다고.”

“…응.”

“나한테 다시 올수도 있었잖아. 남우현한테선 도망쳐도 나한텐 다시 올 수 있었잖아.”

“…응.”

“왜 안 그랬어? 왜 나한테 안 왔냐.”

 

 

참…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렇지만 대답이 분명한 질문이었다. 네 옆에 있으면 난 과거의 이성종에서 온전히 벗어날 수 없으니까. 우현의 집에서 도망쳐 너를 따라간 이성종도, 너와 밤낮 없이 섹스를 하며 연우의 생각에 괴로워했던 이성종도, 연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정을 했던 이성종도, 도망쳐 있던 그 일주일 동안 연우의 아픔을 모르고 있었던 이성종도…. 네 옆에 있으면 그 이성종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살아 숨 쉴 테니까.

 

그렇지만 그런 말을 다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우현 그리고 명수가 나타남으로서 과거의 이성종도 살아나 버렸다. 그때 ‘도망’이라는 선택으로 죽여 버렸던 끔찍한 열여덟의 이성종은 다시 살아난 거였다. 명수의 물음에 대해서 솔직하게 얘기한다 한들 이제는 아무 의미 없는 짓이라는 거였다. 또 도망쳤지만 결국 제자리니까, 지금. 그 섹스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해 자위를 하며 연우에게 미안해하고 있으니까, 지금.

 

 

“명수야. 사랑은…,”

 

 

사랑이라는 말을 뱉어놓고도 이 말이 맞는 걸까 싶었다. 그렇지만 다른 말로 대체할 것도 딱히 없었다. 그래, 아마도 그 사랑이란 것은 말이야.

 

 

“할 듯 말 듯한 순간이 가장 아름답다더라.”

“……”

“그냥 네가 오래도록 날 좋아하게 놔두고 싶었어.”

 

 

조금은 몽롱한 기분이 되어 그 말을 한 것 같았다. 말을 해놓고 보니 왠지 부끄럽기도 했지만. 대답을 들은 후 다시 옆 자리로 풀썩 스러진 명수는 그대로 다시 성종의 어깨 위에 제 턱을 올려놓고 오른 팔로 성종의 몸을 가득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고운 숨이 성종의 볼에 와 닿았다.

 

 

“이성종… 못돼 처먹었네.”

 

 

그래, 이 정도 거리라면… 괜찮지 않을까, 우리. 아니, 연우야. 연우야, 이 정도라면 나, 괜찮지 않을까. 우현이와도, 명수와도.

 

밤이 자꾸 깊어졌다. 비는 그칠 줄을 몰랐고, 명수는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숨을 고르게 쉬었다. 이 인생은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걸까.

 

 

 

 

 

 

-

 

 

오랜만에 만난 명수와 성종이... 단조롭네요. 이쁜것들...

 

몇 년 전에 어떤 이에게 그때 당시 제가 마지막으로 썼던 단편을 보여준 적이 있었어요.

그 사람은 저더러 소설보단 수필을 쓰는 게 더 낫겠다고 말했고요.

지금 소설을 쓰며 그 사람이 했던 말이 생각날 때마다 많이 부끄럽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저는 시나 수필을 백권 읽는다면 소설은 한두권 읽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매편 남겨주시는 댓글들, 칭찬의 말씀들, 볼 때마다 감사하면서도 부끄러워질 때가 많아요.

내가 뭐라고 이런 과분한 칭찬과 사랑을 받는 건가 싶어져요. 이런 사람이라 죄송합니다...

그리고 많이 부족하지만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저의 모자란 부분이 보인다면 말씀 해주세요. 어떤 피드백이든 달게 받을게요. :)

 

 

저는 10일부터 열흘 정도 짧은 여행을 떠나요. 아마 여행을 다녀와서야 7편을 쓰지 않을까 싶어요.

울타리 기다려주시는 분들께 죄송하네요 ㅠㅠ 여행하는 동안 많이 읽고, 조금이라도 성장해서 올게요.

 

 

 

Posted by Jo_s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