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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9.06 [김현중/박정민] 흉내





폴더를 열어 본 휴대폰 화면의 시계가 4시 30분이 되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 틈으로 내 입김이 퍼져나갔다. 이른 3월의 어느 날 내린 흰 눈에 넋을 잃고 말았다. 아직도 너를 잊지 못한 내가 너무 못나고 미워서, 그런 나를 이미 잊었을 네가 너무 두려워서. 그래서 눈물이 났다.

뛰자, 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내가 뜻하지 않았음을. 몸이 먼저 반응하고, 몸이 먼저 찾는다는 것은 내 손끝부터 발끝, 머리끝까지의 모든 세포들이 그를 원하고 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가 세게 그러쥐던 깍지라든지, 따뜻하게 안아주던 양 팔이라든지, 장난을 걸어오던 아이 같은 모습이라든지,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중저음의 목소리라든지. 내게 익숙하지 못한 것은 그런 그가 아니라 그와의 결별로 인해 찾아온 외로움이었다. 그것이 저 바다 밑바닥까지 가라앉았을지언정, 수심을 가늠할 수 없는 깊이와 뿌리칠 수 없는 수압은 지금 그에게로 달려가고 있는 내 마음의 크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바다 가자.', '갑자기 웬 바다?', '겨울바다, 보고 싶어.'



찬바람이 그 언젠가 함께 갔던 바닷가에서처럼 양볼을 세게 스쳐갔다. 하지만 다르다. 그때와는 너무나 다르다. 단지 그가 내 옆에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차갑기만 했던 바람이 아프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확연히 다르다. 아니, 어쩌면……, 그때는 그가 곁에 있다는 것 때문에 추위마저 이겨냈을지도.

그의 아파트 아래에서 한참을 고민하고 한참을 서성였다. 이사라도 갔으면 어떻게 해? 날 아예 모르는 사람 취급하면 어떻게 해? 정말……, 나라는 사람 잊어버렸으면 어떻게 해?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나는 도저히 그 해답을 찾을 수 없다. 그를 만나야 한다. 그를 만나고 싶다. 하지만 여전히 두렵다.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를 잊지 못한 나만 바보가 되어 버릴까봐. 그래서 지금 앓고 있는 상처가 더 깊어질까봐, 덧날까봐. 그런데 그게 오히려 곪는 것보다 나을 것 같다.

좁은 복도와 위층, 아래층으로 이어진 계단으로 초인종 소리가 짧게 울렸다. 다시 한 번 더 누르자 인기척이 느껴지고 너무나 익숙하고 그리웠던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내 눈시울을 붉혔다. 누구세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고개를 꺾어 천장을 쳐다보았다. 차마 대답할 수가 없어서 그저 조용히 흐느꼈다. 참았던 눈물이 양 눈 꼬리를 타고 흘러내렸다. '울자'. 과연 그 두 글자도 뛰자처럼 내가 뜻하지 않았음에도 절로 이뤄진, 지금껏 내가 앓아 온 그리움의 한 종류일까. 그래, 울자. 울자, 울자.



"너……."



문이 열리고 그가 보이면 나는 운다. 그와 눈이 마주치고 눈물을 훔친다. 아니다, 안 된다, 안되겠다.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너 없이는 안 되겠다. 다시 닫히는 문을 보며 고개를 푹 숙였다.



"비밀번호 그대로인데 초인종은 왜 눌렀어."









내 손으로 직접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았다. 문고리를 돌리지도 않았고 초인종을 다시 누르지도 않았다. 닫히던 문이 다시 열어 젖혀지고 그가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결국 내가 의도했던 것은 그의 집 앞에 도착해 초인종을 누른 것 까지였다. 그래서 기뻤다.



'춥지?', '응, 바람이 너무 많이 분다.', '안아줄까?', '어우~ 징그럽게 왜 그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난 그의 품이 좋았다. 지금은 그의 품에 안길 수 있게 해주던 바람도 없고, 사랑도 없다. 그 때 그 바닷가에서 마주보고 선, 혹은 겹쳐 선 우리를 향해 불던 바람은 도대체 어디에. 그 때 그 모래사장보다 더, 깊고 너른 바다보다 더 크리라 믿었던 사랑은 어디에. 2년 전의 너와 나는 정말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그의 집은 놀라울 정도로, 소름 돋을 정도로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크리스마스에 내가 선물해 주었던 머그컵과 DVD 영화 몇 편부터 내가 골라 준 커튼, 쿠션, 식탁보, 화분까지. 그리고 늘 내가 신었던 실내화도 그대로 현관 앞에 있었다. 현관 앞에서 주춤하던 내 발 앞에 변함없는 그 실내화를 놓아준 그는 과연 변화가 생겼을까. 나를 증오하던 마음에서 시작된 그 사랑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함'으로 결말을 맺었지만, 언젠가 다시 또 증오로 시작해 사랑으로 부를 수 있는 마음이 되지 않을까.

그의 여동생. 교통사고. 그와 나의 눈물. 그의 사랑. 누군가 그렇게 묻겠지.



'정말 복잡한 사랑하셨네요. 힘들지 않았어요?'



그 사랑 지금도 하고 있어요. 당연히 헤어지던 날엔 아닌 줄로만 알았죠. 그야 헤어지는 이유는 더 이상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니까.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2년 전 그날 펑펑 울던 그를. 힘들었어요, 너무. 그런데 여전히 멈추지 못했어요. 오늘에서야 알았어요. 그 날처럼 봄이 다가온 시기에 눈이 오고, 그 눈과 공기 사이로 하얀 입김이 퍼져나가는 모습 때문에. 정말 아직도 내 마음이 사랑인지는 모르겠다. 잊지 못한 그 거리를 달려오고, 잊지 못한 층수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잊지 못한 그의 목소리에 눈물이 난 것은 단지 그리움과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모르겠다, 아직도 나는. 지금 내 모습이 원래의 내 모습이고, 지금 내 행동이 제대로 된 것인지 정말 모르겠다.

군대를 면제 받고, 나는 그의 여동생을 사랑했다. 아니, 사랑이라기보다 군대에 간 그가 없는 동안 그의 여동생을 친오빠처럼 챙겨주는 입장이 되었다. 고작 열여덟 밖에 되지 않은 그녀는 날 잘 따랐고 좋아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더딜 줄만 알았던 약 2년은 두 달도 채 넘기지 않은 것처럼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공부에 지쳐있는 그녀를 응원하고 힘들어 하는 그녀를 달래주며 나는 진심인지도 분간 못할 어리고 무딘 사랑을 겪었다.

차를 구입한 후 처음 태운 사람은 대학생이 된 그녀였다. 그 날의 교통사고에 대한 변명을 하자면, 그녀의 죽음에 대한 변명을 하자면, 이제 지하철 탈 일 없겠다며 좋아하던 그녀와의 즐거운 대화 때문이었다. 그녀와 함께한 시간은 전부 소중했고 늘 즐거웠다. 내게 과분할 정도로 사랑스러웠던 그녀인데, 그런데 왜 난 조금 더 그녀의 안전에 신경 쓰지 못 했을까. 한심하게, 바보 같이 그렇게 떠나보내야 했을까. 왜 하필이면 바로 다음 날이 그가 돌아 온 날이었는지 나는 아직도 의문이다.

나는 친구의 동생을 사랑했다. 나는 사랑했던 그녀를 지키지 못했다. 나는 그리고 친구와 사랑했다.



“내 동생이 죽었다는 것도 화가 났는데, 그 애와 네가 사랑했다는 것도 화가 났어.”



그래, 맞다. 우리가 친구라는 이름으로 함께 할 때도 그는 나를 사랑했다. 그가 나를 증오하던 마음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기에, 우린 결국 울다가, 울다가 사랑했다. 남들이 이해 못할 사랑이라도 우리에겐 그게 옳았다. 그도 나를 미워하고 나도 나를 미워했다. 우린 똑같이 ‘박정민’ 이라는 사람을 미워했다. 나쁜 놈, 정말 나쁜 놈. 그런데 그가 나를 미워하는 일을 도저히 못하겠다고 했다. 좋아해 왔다고 했다. 사랑하자고 했다.

나 정말 왜 이렇게 못됐니. 왜 이렇게 사랑 받으려고만 하니.

바다 아래를 거닐었다. 내 발 아래의 모래가 날 강하게 잡아당겼다. 두근거렸다. 온 몸이 젖어 들어갔다. 발을 내딛을수록 수심은 깊어졌고, 난 숨을 쉬지 않았다. 올려다 본 하늘 아닌 하늘은 바닷물에 잠겨 있었다. 저 위로 올라가면 널 만날 수 있을까. 네가 내 것이 될까.



“우리, 흉내만 내보자.”
“……뭐?”
“그때처럼, 사랑하는 것처럼 흉내만.”



우리 둘 중 누구도 여성스럽거나 여자 같은 사람은 없었다. 서로 남자로서 사랑을 했을 뿐이지. 데이트랍시고 농구를 하기도 했고, PC방에서 게임만 한 적도 있다. ‘친구’였을 때처럼 주먹을 주고받으며 싸운 적도 있었다. 우리의 마지막 날이었던 2년 전 그 때에도 나는 그의 뺨에 주먹을 꽂았다. 붉어진 뺨을 부여잡고서 그가 말했다.



‘미안, 그만하자.’



사랑이란 것은 어떻게 흉내 내야만 할까. 그 때처럼? 내가 그 때 어떻게 너를 사랑했지? 그 때의 나를 흉내 내야 하는 것일까? 하루하루가 즐겁고 너를 만날 생각에 들뜨고, 네 얼굴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그런 것. 내 발 아래의 모래가 날 잡아당기는 것처럼 두근거린다. 그런데 어째서 ‘다시 사랑하자’가 아닌 ‘흉내만 내보자’일까.









나의 시간은 징그럽도록 느리게 흐르거나, 때론 무섭도록 빠르게 흘렀다. 꿈속에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나를 손가락질하며 미친놈이라고 욕을 해댔다. 걸음은 멈춰지지 않았고, 나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모두가 날 흘겨보았고 모두가 날 피했다.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 주저앉으려고 할 때, 어디선가 나타난 그가 내 손을 감싸 쥐고 같이 걸음 해 주었다. 그리고 다시 주위를 돌아보았을 때 그곳은, 내가 올려다보았던 하늘 아닌 하늘, 바닷물에 잠겨있던. 그의 손을 잡고 물위를 걸었다. 지금 내 마음의 크기도 그 때 그 수심과 수압에 비교할 수 있을까. 내 발 아래 늘 있던 모래가 잡아당기는 힘의 세기는 어쩌면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의 크기였는지도 모른다.

눈을 떴을 때 나는, 역시나 변함없는 그의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눈이 쏟아지는 새벽 거리에 또 다시 혼자 남겨지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한참을 그 거실 바닥 위에 서있었다. 그가 날 방 안으로 밀어넣으며 말했다.



‘다시 돌아와.’



새벽 내내 펑펑 울다 잠이 들었다. 이유도 모르는 눈물은 그간 흘리지 못했던 것들과 함께 흘러내렸다.


그와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살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가 직장에 취직한 이후에도. 난 그와 헤어지기 전까지 에디터 일을 했다. 후엔 하던 일을 접고 그냥 내 마음에 의지했다. 공부라도 하고픈 심정이었고, 멀리 떠나고도 싶었다. 그와 이별을 맞은 지 1주일도 안되어 난 엄마가 계신 캐나다로 출국했다. 그렇게나 싫어했던 억지로 배웠던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고, 그 곳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그가 없는 생활에 익숙해지려. 그리고 약 2년 만에 다시 돌아 온 한국의 이른 봄에는 2년 전 그 날처럼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방문을 열었다. 둘이 살기에도 심하게 넓은 집은 다시 익숙해져 가고 있다. 그가 거실 소파 위에 잠이 들어있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 일부러 모른 척 하고 다른 것에 시선을 두려 해도 안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사랑했던 때라면 자고 있는 그의 얼굴에 입을 맞추는 게 두렵지 않았을 텐데. 지금은 단지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니까…….

씻고 나왔을 때에야 그가 깨어있었다. 뭘 어찌해야 할지 모든 게 다 어색하기만 하다. 새 칫솔을 꺼내 쓰고 그와 나란히 서 양치질 하지 않았다는 것부터. 그래도 더 이상은 달라진 것이 없어서 기쁘다. 2년 전의 나를 흉내 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기쁘다.

그가 집에 없을 때의 내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그가 집에 있을 때의 내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그가 집에 없을 때 나는 새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글을 쓰고 싶어서 공모전 따위를 알아보기도 했고, 다시 에디터 일을 시작 할 수 있을지도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가 집에 있을 때 나는 때때로 찾아오는 숨 막히는 정적에 온몸을 다 비틀기도 했다. 그런 그와 나의 사이가 일주일 째 지속 될 쯤에 주말을 이용해 우린 바다에 가게 되었다.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보던 중에 화면에 잡힌 바다가 내 입을 열게 했다.



‘주말에 바다 같이 가자.’
‘……그래.’



그도 나도 겨울 바다를 좋아했다. 자주 놀러가는 곳도 바다였다. 여름이든 겨울이든 보트를 탄다거나 바닷가 근처에서 지내는 것도 좋아했고, 배를 타고 여행하는 것도 즐겼다. 그저 유람선 안에 갇혀있을 뿐이었지만. 무엇이든 즐겁지 않은 일은 없었다. 그와, 함께라면.

역시나 바람은 찼다. 그와 함께 있어도 찼다. 사랑이 아니라서 찼다. 그와 함께 해변을 걷는 것이 너무나 오랜만이라 가슴이 다 두근거렸다. 바다 아래 모래가 날 잡아 당기는 것처럼 우리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말없이 나란히 걸었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 걷기도 했다.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고요히.

그렇게 마른 모래 위를 걷다 그가 내 앞을 막아 마주보고 섰다. 의아해 하며 바라 본 그의 두 눈이 두어 번 깜빡였다.



“2년 전으로 돌아가자.”







좋은 아이디어였다, 동성애에 관한 글을 모아 책을 내자는 의견은. 내 글이 가장 마지막에 실렸고, 난 내 글까지 전부 읽고 책을 덮었다. 10편이 넘는 글 중 내 글만 ‘소설’이었다. 전부 동성애에 관한 의견이나 수필 등이었다.

‘박정민’이라는 내 이름을 직접 넣은 것을 후회했다. 괜히 더 비참해지는 것만 같았다. 차라리 나도 수필을 쓸 걸, 하곤 후회했다.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을 주인공으로 내가 뭐하는 짓인가 생각도 들었다.

메일이 여러 개 왔다. 개중에는 수필이냐, 소설이냐 묻는 것이 많았다. 답장을 보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다. 세상이 날 미친놈 취급 할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불쌍한 놈, 안타까운 놈으로 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내 글과 내 사랑에 당당하고 싶은 마음에,

2년 전 까지는 제 이야기가 맞아요. 하지만 그 후에는 캐나다로 떠난 것 말곤 전부 허구입니다. 2년 전에 그 사람은 죽었거든요. 백혈병에 걸렸는데 수술하다 결국 제 곁을 떠났어요. 이번 글 ‘흉내’는 그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적어 본, 2년만의 소설입니다.









흉내 THE END





10년 3월 26일.
조금은 가슴 아픈 회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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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o_s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