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표지, 리미트리스 세인님께서 수고해 주셨습니다. 감사드려요.

 

 

 

 

울타리

 

 

 

가진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던 어린 우리. 말과 행동으로 모든 걸 드러내야만 하는 병에 걸렸던, 감추거나 간직하는 걸 몰랐던 치기어린 우리. 그 시절의 나는 나를 충분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서로의 가슴 속에 누군가 한 사람쯤은 지독한 암 덩어리처럼 키우고 있었던 시절. 김명수에게선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사랑이란 걸 배웠고, 남우현에게선 서로의 불행을 온전히 이해해 주는 것만으로도 사랑이라고 배웠다.

 

 

 

울타리 下 - 8

 

 

 

어딘가 멀리 다녀온 것 같았던 새벽 이후, 해가 떠올라도 한참을 더 잠을 이루는 명수의 곁에서 성종은 쉽사리 잠에 들지를 못 했다. 눈을 감지도 못하고, 옆에 누운 이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그저 꿈뻑꿈뻑 느리게 감았다 뜨길 반복하는 시야 사이로 천장만 쳐다보았다. 연우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일 때면 눈물이 날 것 같다가, 다른 사람의 얼굴이 보일 때면 다시 정신이 말똥해지곤 했다.

 

바로 옆,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오는 숨소리를 멍청히 듣고만 있었다. 그의 옆에 있기 위해서 그를 좋아하는 걸로 하겠다고 말했던 것, 그때 그건 아무 감정도 아무 의미도 없이 쉽게 할 수 있는 말이었을까. 아무 감정도 들지 않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다른 이의 얼굴이 떠오른다면 그건? 그건 어떤 감정이 있어서인 걸까….

 

줄곧 천장을 향했던 몸을 돌려 명수를 등진 채 모로 누웠다.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잡았다. 덧없이 흐른 시간은 어느새 오전 10시였고, 도착한 연락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안부를 전하는 우현의 것과 어젯밤 만났던 성열의 것이 있었다. 그것들을 몽땅 무시한 채 통화목록을 켜보았다. 그곳엔 2년 동안 늘 한 사람만 있었다. 아저씨라고 저장 된 김성규 단 한 사람. 그런데 요 며칠 그 목록은 그 사람 외의 다른 이름들로 잔뜩 헤집어졌다. 우현 그리고 명수 그런 이름들…. 늘 가장 위에 바로 있던 이름이었는데 지금은 남자의 이름을 찾으려 휴대전화 화면 위로 손가락을 한 번 슥 움직여야만 했다.

 

 

‘응.’

“아저, 씨.”

‘무슨 일 있니?’

 

 

늘, 늘 한결같고 변함없는 이 목소리와 말투. 전화를 걸려 이름을 터치하는 순간까지 망설였던 마음을 위로하듯 그 평온한 목소리를 들으니, 복잡했던 머릿속도 차분해지는 것 같았다.

 

 

“아니요…. 갑자기 전화해서 죄송해요. 바쁘시죠?”

‘괜찮아. 얘기 해.’

“그냥… 그냥 전화했어요.”

‘……’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요.”

‘……’

“잘 모르겠어요. 죄송해요.”

‘성종아.’

“아저씨.”

 

 

서로를 부르는 목소리가 겹쳤다. 그가 무슨 말을 할 거라 여기고 기다리던 성종은 아무 말이 없는 전화기 너머의 침묵을 불안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때 등 뒤에서 허리를 감아 안아오는 팔을 느꼈다. 명수의 따뜻한 체온이 등 뒤로 가득 느껴졌다.

 

 

“잘 모르겠는 건, 잘 모르는 채로… 그대로 둬도 되죠?”

‘그래.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알게 되는 때가 오는 거지.’

“……”

‘혹은, 네가 알고 싶어지는 때가 오기도 하는 거고.’

“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네…. 월요일에는 돌아오세요?”

 

 

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 말도 행동도 없는 등 뒤의 명수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고른 숨이 목 뒤로 규칙적으로 닿아왔다.

 

 

‘그래야지. 월요일에 보자.’

“네. …아저씨.”

‘……’

“단어, 잘 외워갈게요.”

‘그래.’

 

 

통화를 마치고 전화기를 손에서 놓았다. 그것이 매트리스 아래로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를 듣다가, 몸을 약하게 움직이며 더 밀착해 오는 명수를 다시 인지했다. 조심스럽게 몸을 뒤틀어 명수가 있는 쪽을 향해 돌아누웠다. 눈을 꼭 감은 채 얌전히 숨만 쉬고 있는 그 얼굴을 쳐다보다 이상한 충동으로 그 품을 파고들었다. 꼭, 더 꼭 안아주는 양 팔과 가슴에 온전히 의지한 채 눈을 감았다. 이대로 깊은 잠에 들어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점심쯤 깨어난 명수는 집에 돌아갈 생각이 없는지, 씻고 나와 배가 고프다며 냉장고를 열어보다가 싱크대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결국 과자 몇 개를 팔에 끼고 매트리스 위로 돌아왔다. 지난 주말, 우현이 사온 과자였다.

 

 

“집에 안 가?”

“가면 뭐 해. 삼촌도 없는데.”

“안 가고 뭐할 건데.”

“난 너 구경할 테니까, 넌 너 할 일 해.”

 

 

태연하게 들리는 그 말이 어이가 없어서 그를 흘겨보다가 갑작스런 진동에 놀라 성종은 몸을 움찔거렸다. 우현인가, 생각하며 전화기를 보았지만 뜻밖의 이름은 성열이었다. 성종아, 너 무슨 대학교 근처에 산다고 했지? 나 학교 후문 앞인데…. 그런 말을 들으며 명수를 힐긋 보았다. 한 손으론 과자를 집어먹으며 다른 한 손으론 휴대폰 화면을 슈욱슈욱 내리고 있는, 과자를 씹는 건조한 표정.

 

 

“편의점 갔다 올게.”

“먹을 거 사올 거야?”

“응.”

“금방 올 거지?”

“응.”

“많이 사와. 많이, 많이.”

“돈이나 주면서 그런 말 하던가….”

 

 

대충 옷을 주워 입고 집을 나섰다. 성열이 말했던 학교 후문과 집은 멀지 않았고, 조금 걸으니 멀찍이 익숙한 인영이 하나 보였다. 그의 머리 위로 학교 앞의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야, 성종이.”

“어제 잘 들어갔어? 많이 취했잖아.”

“집이 바로 근처여서 들어가자마자 뻗어서 잤어. 너 만나니까 너무 반가워서 막 마셨나봐.”

 

 

성열이 해사하게 웃었다. 어제도 그 웃음은 2년 전과 다를 게 없었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만난 사람이 바로 앞에서 이렇게 웃어주는 일은 여전히 어색했다. 그리고 어제의 성열은 남들과는 다르게, 그동안 어디서 무얼 하고 살았는지에 대한 걸 묻지 않았었다. 그때 갑자기 왜 사라졌느냐라든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라든지. 그런 말을 성열을 통해서는 듣지 않아서 좋았지만, 오늘의 이 만남은 어딘지 불안했다.

 

 

“밥 먹었어?”

“아니, 난 아직.”

“그래? 그럼 같이 뭐 좀 먹자. 나 속이 너무 쓰려.”

“아, 저기, 나….”

“응?”

“집에, 명수 기다리고 있어. 편의점에서 뭐 먹을 것 좀 사오겠다고 말하고 나왔거든.”

“아… 그래?”

 

 

이상했다. 명수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순식간에 모습을 바꾼 성열의 그 표정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이유 모를 그 불안함이 커져가는 동안 잠시 고민을 하는 것 같던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편의점 가서 넌 먹을 거 사고, 난 컵라면 하나 먹어야겠다.

 

편의점 음식 몇 가지가 든 봉투를 들고 성열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성열은 컵라면이 익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성열과 함께 무언가를 먹고 싶었지만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명수가 신경 쓰였다. 그런데 속이 안 좋기는 성종 자신도 마찬가지라 결국 이온음료 하나를 사들고 벌컥벌컥 들이킬 수밖에 없었다.

 

 

“명수, 다시 보니까 어때?”

“…어떻냐니, 뭐가?”

“뭐, 그냥. 오랜만에 만났잖아, 엄청.”

“나 성열이 너도 오랜만에 만났어, 엄청.”

 

 

덮어두었던 뚜껑을 젖혀 연 성열은 제 앞에 놓인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가 넓적한 용기 안에 젓가락을 꽂아 대충 휘휘 저어 면을 풀고, 그것을 들어 올려 입 안에 넣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다시 묻고 싶었다, 어떻냐는 건 무슨 의미를 담은 질문인지.

 

 

“그렇지. 근데, 나랑 김명수는 다를 거 아냐, 너한테.”

“…어?”

 

 

의미심장한 말을 뱉어놓고 다시 라면을 먹는 성열의 옆얼굴을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픈 건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아니… 모른 척, 알 수 없는 척 하고 싶었다.

 

 

“성종이 너한텐 미안한 얘기일 수 있는데,”

“……”

“나는 지금 네가 왜 김명수 앞에 다시 나타났는지 모르겠어서.”

 

 

음식을 씹으며 우물거리듯 말하는 성열의 습관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목소리는 그답지 않게 작고 차분했다. 왜인지 수심이 깊어 보이는 그 목소리와 얼굴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 성종은 방황하는 시선을 둘 곳을 못 찾고 고개를 수그린 채 이온음료의 병뚜껑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기를 반복했다. 성열이 라면을 먹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 명수 걔랑 중학생 때 만났어. 그러니까 벌써 6년? 7년?”

“…응.”

“알 거 다 알아, 걔에 대해선.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

“밥 먹을 때, 화장실 갈 때, 잠 잘 때, 사소한 습관도 다 알고. 걔가 죽기 직전까지 팼던 애들 이름도 다 기억하고, 지금까지 어떤 여자애들 만났는지도 다 알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성열아.”

“…성종이, 넌.”

 

 

음식물을 씹으며 멍하니 앞만 보던 성열이 옆자리를 돌아보았다. 성종은 고개를 들어 그런 성열의 눈을 맞추었다. 눈을 몇 번 깜빡거리던 성열은 다시 얼굴을 정면으로 돌리고 사발 용기를 들어 라면 국물을 마셨다.

 

 

“김명수한테 좀… 이상한 존재였어. 명수 걔는 행동이 늘 뻔했거든. 어디 가서 뭐하고 있을지 늘 파악이 됐고, 그리고 내가 생각한 대로 명수는 항상 그러고 있었어. 교실에 없으면, 옥상 아니면 강당이었고. 바나나우유가 없으면 초코우유도 딸기우유도 안 먹고 흰 우유만 먹었어, 걔는. 어떤 새끼 때문에 화가 좀 난 것 같아 싶어서 그 새끼가 있는 곳에 가보면 김명수도 있었고.”

“……”

“그렇게 속이 다 보이는 앤데, 나한테는.”

“……”

“근데 김명수에 너를 대입해보면 나는 명수가 어려워지는 거야.”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나도 모르겠어, 성종아. 너 처음 전학 왔을 때 명수랑 밥 먹다가 이런 얘길 했어. 전학생, 남자앤데 예쁘게 생겼다고. 그랬더니 명수가 묻더라, 꼴리냐고. 그래서 나는 남자 새끼한테 꼴리긴 뭐가 꼴리냐고 씨발 더럽다고 그랬거든. 근데 그땐 몰랐어, 그게 명수 그 새끼 얘기인 줄.”

“……”

“너 갑자기 사라지고 나서 명수 어땠는지 모르지. 미친 것 같았어. 미친놈이었어, 진짜. 그렇게 씨발 씨발 거리던 학교에 꼬박꼬박 나와서는 수업도 하나도 안 빼놓고 다 들었어. 책상에 그냥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갑자기 교실 문이 열리기라도 하면 벌떡 벌떡 일어나고. 혹시라도 성종이 너 올까봐 그랬겠지.”

“……”

“수업 끝나면 강당에 처박혀서 몇 시간씩 드러누워 있다가 집에 가고 그랬어. 그것도 혹시 네가 올까봐 그랬을 거야. 네 전화기는 계속 꺼져있다는데 거기다 매일매일 전화를 걸고.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는데도 넌 안 오고 전화도 안 받고. 기말고사 기간이 됐어.”

“……”

“시험 마지막 날이었어. 아직도 기억나, 나는. 종 치자마자 명수가 뛰쳐나갔어. 왠지 불안해서 나도 금방 따라갔거든. 근데 6반이었나, 암튼 그 남우현이라는 애. 운동장에서 걔를 막 발로 차고 있더라. 걔한테 성종이 너 어디 있냐고 그러면서. 그냥 뒀다가는 우현인가 뭔가 걔 많이 다칠 것 같아서 내가 말렸어. 근데 남우현이 막 울더라.”

“……”

“그리고 명수 이 새끼도 주저앉아서 우는 거야. 그때 알았어, 나는. 아니, 알고 있었는데 모른 척 하고 있었던 걸 확실히 알아버린 거지. 김명수한테 이성종은 뭔가… 엄청 특별했구나, 뭐 그런 걸.”

“……”

“나는 명수가 어떤 일로 좀 힘들든 말든 상관없어, 걔가 도와달라고 하지 않는 이상. 자기 인생 알아서 잘 살겠지. 그리고 정말 너무 힘들 때는 말 하겠지. 아무리 친하고 가까운 사이여도, 우리가 서로에게 관여하는 건 그 정도였어, 지금까진.”

“……”

“근데 성종아. 나는 명수 걔가 그렇게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거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아.”

“……”

“성종아. 명수 힘들게 하지 마. 나는 잘 모르겠어. 네가 명수랑 계속 같이 있는 게 명수에게 힘든 일일지, 네가 어느 날 또 갑자기 사라지는 게 더 힘들 일일지. 근데 그냥… 얘기 하고 싶었어.”

 

 

내내 어울리지 않는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던 성열은 결국 또 웃었다. 웃다가 남은 라면을 깨끗이 비우고 의자의 등받이로 몸을 기댔다. 그런 성열을 보다가 그의 빈 라면 용기를 보다가 다시 그의 얼굴을 보았다.

 

 

“몰라, 씨발. 힘들든 말든 내 알 바냐. 그 새끼가 힘들지, 내가 힘드냐.”

“……”

“야, 성종이. 그렇게 심각한 표정 하지 마. 어쨌든 다시 만났으니까 됐지, 뭐.”

“미안해.”

“응?”

“아니야. 다 먹었어? 갈까.”

“가자.”

 

 

성열은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다시 학교 후문 쪽으로 사라졌다. 그에게 몇 번 손을 흔들어주다가 손에 들린 검은 봉투가 느껴져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명수가 생각났다. 걸음을 서둘렀다.

 

좁은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매트리스 위에 널브러져 있는 명수의 모습이 보였다. 봉투를 싱크대 앞에 내려놓고 가까이 다가가니 그가 몸을 벌떡 일으키는 통에 흠칫 놀랐다.

 

 

“야, 왜 이렇게 늦게 와.”

“그럼 네가 갔다 오지 그랬어.”

“너 라면 먹었지?”

 

 

코를 몇 번 킁킁 거리던 그가 표정을 잔뜩 구기며 그렇게 물었다. 성열이 먹은 라면 냄새가 몸에 밴 건가 싶어 성종은 명수를 따라 작게 코를 킁킁거려 보았다.

 

 

“치사하게 너 혼자 먹고 오냐.”

“안 먹었어. 편의점에서 냄새 뱄나봐.”

“뭐 사왔냐.”

“그냥 뭐, 라면이랑 도시락.”

“라면 먹자, 속이 너무 안 좋아.”

 

 

속 안 좋다는 놈이…. 어젯밤과 오늘 새벽의 일을 생각을 하며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전기 포트가 없어서 물을 끓이려면 냄비에 물을 받아 가스렌지 위에 올려놓아야만 했다. 봉투에서 컵라면을 꺼내는 명수를 등지고 성종은 작은 냄비에 물을 받고 가스렌지의 불을 켰다.

 

조그만 상을 펴고 찬 바닥에 마주 보고 앉았다. 일주일 전 우현과도 라면을 사이에 놓고 이렇게 앉았던 것 같은데, 어쩐지 그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야, 라면 더 없어? 부족한데.”

“도시락 데워줄까?”

“내가 데워 먹을게.”

 

 

별다른 말없이 묵묵히 라면을 다 먹고 도시락까지 데워와 먹는 명수를 앞에 두고, 성열이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 시절,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어쩌면 나는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몰라, 나 같은 건 너에게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라고. 항상 똑같은 매일이 반복되는 지겨운 너의 10대에 나타난, 흥미로운 재미거리일 거라고. 늘 너, 너 뿐만 아닌 모든 사람의 기억 속에서 쉽게 잊혀질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어. 그 시절 연우의 곁에 있어주었던 우현에게 했던 말을 나 자신의 신념에도 늘 품고 있었지.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지 말자고, 누군가에게 나만 될 수 있는 그런 건 되지 말자고. 나는 연우를 위해 천만 번도 더 죽은 것 같은데 그래도 죽을 목숨이 부족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내 마음가짐과는 다르게 나는 명수 너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버렸던 건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내가 이렇게 너를 계속 내 옆에 둬도 되는 걸까.

 

 

 

*

 

 

 

하룻밤을 더 자고 가겠다는 명수를 겨우 달래 돌려보냈다. 다음 날엔 우현이 오기로 했으니 명수를 그렇게 그냥 둘 수는 없었다.

 

우현이 말했던 축제가 진행 중인 장소의 입구 앞은 수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일찍 도착한 탓에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아 그나마 한산한 거리의 벤치에 앉아 신발 코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머지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성종아. 고개를 들어본 곳에는 꽃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는 우현이 있었다.

 

 

“일찍 왔네. 많이 기다렸어?”

 

 

우현은 밝은 베이지 색의 얇은 외투를 입고 있었다. 우현의 얼굴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그 밝은 옷이 예뻐서, 반짝거리는 것 같은 그를 한참 쳐다만 보았다. 이발을 했는지 일주일 사이에 조금 짧아진 것도 같은 머리카락의 길이도 잘 어울렸다. 아무런 멋도 부리지 않아 예쁘게 가라앉은 그의 곧은 생머리만큼은 어쩌면 정말 좋아하는 것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배가 고프다며 입구쯤에서 길거리 음식을 두어 가지 산 우현은 천천히 걸었다. 너무 느리지 않은 그 걸음에 맞춰 양 쪽으로 벚꽃이 흐드러진 길을 걸었다. 지난 일주일 중 그 어느 날보다 더 맑은 것 같은 하늘은 연한 색으로 푸르렀고, 그 아래로 분홍빛을 가득 띤 꽃들이 무성히 피어있었다. 꽃 알맹이들 하나하나가 다 살아있었다. 이렇게 만개한 꽃길을 걸어본 건 언제였던가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별 말이 없는 우현을 대신해 거리는 온갖 소음을 들려주었다. 너무 많은 인파 때문에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 데 뒤섞여 웅성거렸고, 음악소리와 호객행위를 하는 소리 따위가 요란하게 공기를 타고 하늘 위로 올라갔다. 어쩐지 낯선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길을 걸으며 우현을 여러 번 돌아보았다. 즐거운지 계속 미소를 짓고 있는 얼굴이 보기 좋았다. 남의 세상에 와있는 것 같은 낯선 느낌이 들면서도, 우현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입구에서 산 음식을 다 먹었는지 우현은 성종의 손에 들린 쓰레기까지 받아들고 저만치 달려가 쓰레기통에 그것을 버리고 금세 돌아왔다.

 

“성종아, 저 애기 봐봐. 진짜 귀엽지.” 우현이 조금 떨어진 거리에, 제 모친일 여자의 손가락을 작은 손으로 꼭 잡고 걸어가는 아이를 가리켰다.

 

“성종아, 저 강아지 봤어? 쟤도 너무 귀엽다.” 길의 맞은편에서 쫄랑쫄랑 걸어오던 개가 귀여웠는지 한참 쳐다보던 우현은, 개가 지나쳐가자 고개를 돌려서까지 한참 쳐다보았다.

 

“와, 이런 데에서도 교복이랑 한복 대여해 주네.” 길 한 편에 교복과 한복을 걸어놓고 대여를 해주는 노점을 발견했을 때 우현은, “한복은 별로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교복 입고 다녀서 교복도 별로”라고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성종아, 사진 찍어줄까?”

“…응?”

“사진! 사진 찍어줄게, 꽃이랑.”

“아, 아니. 나는 괜찮아. 내가 너 찍어줄게.”

“서로 찍어주자.”

“아니, 나는….”

 

 

우현은 커다란 벚나무 한 그루 아래에 성종을 남겨두고 멀찌감치 달려갔다. 웃어, 성종아. 우현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웃음이 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뭘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라 성종은 그저 우왕좌왕하며 나무 아래 서있기만 했다. 잠시 그러고 있으니 우현이 다시 달려왔고, 그랬음에도 사진은 예쁘게 잘 나왔다는 둥의 말을 건네 왔다.

 

누군가 사진을 찍어준 적도 없었고, 남의 사진을 찍어줘 본 일도 없었다. 그래서 갖고 있는 연우의 사진이라곤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 찍었던 증명사진 하나뿐이었고, 뒤늦게 그걸 후회하기도 그러나 다행이라고 여기기도 했었다.

 

이번엔 성종이 우현을 남겨두고 벚나무에서 멀어졌다. 휴대폰 화면에 가득 담기는 분홍빛의 나무와 그 아래 우현의 모습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만개한 벚꽃보다 우현의 웃는 얼굴이 더 예뻐서, 손가락 두 개로 화면을 확대해 보다가 우현의 얼굴이 흐릿해지는 게 싫어 결국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 사이에 우두커니 서있어야만 했지만 그런 걸 감수하게끔 해주었다, 그의 웃는 얼굴이.

 

이렇게 그리고 저렇게 한참 사진을 찍고 있으니 화면 안에 있던 우현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화면 밖으로 사라진 그는 성종의 바로 앞에 다가와 있었다. 손을 들어 올려 우현의 머리 위에 앉은 꽃잎 하나를 떨궈냈다. 그는 어김없이 환하게 웃었다.

 

불현듯 또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이렇게 예쁘게 웃는 우현이, 2년 전 어느 날엔 성종 자신 때문에 누군가에게 폭력을 당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데도 아무 일 없었다고 말하는 그가 미안하고 안쓰러워서. 그리고 성종이 다 알고 있다고 말해도 괜찮다고, 아무렇지 않았다고 말할 우현이란 걸 알아서. 그리고 성종의 부재보다 연우의 죽음이 더 끔찍했을 거란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때 우현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리고 슬퍼했을 지는 감히 가늠할 수도 없었다.

 

 

“저, 혹시….”

 

 

한참을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걷다가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지 않는 길 어귀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우현의 자취 그리고 학교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데, 언제 다가왔는지도 몰랐던 어느 여자의 목소리에 우현에게만 향했던 시선을 돌려 보았다. 우현도 성종도 무척 의아한 표정이 되어, 우현의 앞에 다가온 여자를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봤는데, 연락하고 지내고 싶어서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우현만을 향해 있는 여자의 시선에 성종은 설핏 웃음이 났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 우현의 얼굴마저도 웃겼지만, 웃음소리를 내어 웃지 않으려고, 웃고 있다는 걸 티내지 않으려고 성종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번호 좀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네, 네? 번호… 번호요?”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는 우현의 앞으로 여자가 밝게 화면이 켜진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그걸 받아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무슨 말을 하는 것도 아닌 채 우현은 상황파악이 안 된 사람처럼 멍청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혹시 여자친구 있으신가요?”

“네?”

“아니에요, 얘 여자친구 없어요.”

“아, 저기, 그게.”

 

 

불쑥 끼어든 성종의 말에 뭔가 곤란한 상황에나 하는 행동처럼 뒷목을 살살 긁던 우현은 어색하게 웃었다.

 

 

“저 여기 사는 게 아니고 놀러 온 거라.”

“어? 그럼 어디서 오셨어요?”

“저는 서울…,”

“아, 정말요? 저도 서울에서 놀러왔어요!”

“…네?”

 

 

거절의 말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망설이다 겨우 그 말을 꺼낸 것 같은데, 예상하지 못한 여자의 반응에 더 당황해버린 우현의 모습이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성종은 쿡쿡 웃다가 우현을 대신해 운을 뗐다.

 

 

“얘가 낯을 많이 가려요.”

“그러시구나. 괜찮아요, 제가 낯을 안 가려서.”

 

 

그 당돌한 말에도 웃는 사람은 성종뿐이었고, 우현은 여전히 당황한 얼굴을 한 채 여자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못 하고, 성종과 여자의 휴대전화만 천천히 번갈아 보았다. 웃음을 그치고 우현의 옆얼굴 가까이로 다가가 귀에 작게 속삭였다. 번호 알려줘, 예쁘잖아.

 

어쩐지 노려보는 것처럼 힐긋 쳐다보는 우현에게 성종은 씨익 웃어보였다. 망설이는 건지 다른 거절의 말을 찾는 건지, 입술을 여러 번 꾹 물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던 우현은 여자의 전화기에 제 번호 열한 자리를 찍어주었고, 고맙다며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향해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오오~ 남우현~ 학기 시작하자마자 고백 많이 받았다는 말, 믿어도 되겠는데?”

“걔네들도 다 찼는데 내가 이제 와서 저 여자한테 번호를 왜 줬을까….”

“그냥 거절하는 것보다 서로 기분은 좋잖아.”

“이게 다 너 때문이야.”

“그치? 잘 되면 나한테 한 턱 쏘는 거 잊지 마.”

 

 

우현이 한숨을 폭 쉬었다. 벤치에 앉은 다리 네 개 아래로 약한 바람에 실려 온 꽃잎이 굴러다녔다. 그래도 우현은 금세 다시 웃었다. 어떤 교수가 말도 안 되는 양의 과제를 내주어서 평일 내내 그걸 마무리 하느라 고생했다는 이야기. 다음 달엔 학교 축제가 있을 거라 벌써부터 다들 축제 때문에 들떠 있다는 이야기. 우현의 그런 사소한 이야기들을 듣는 일이 즐거웠다.

 

 

 

*

 

 

 

더딘 것만 같던 시간이 약 올리는 것처럼 빨리 흘러버린 것 같았다. 인생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 이후로 한동안은 모든 게 어색했는데, 그래도 그것 역시 금세 적응이 되었다.

 

주말이면 우현이 내려왔고 하루를 함께 보냈다. 우현은 단 하루도 빠짐없이 전화나 문자를 보내왔고, 하다못해 몇 개 주고 받던 연락이 갑자기 늦어질 것 같으면 그 이유에 대해서도 꼬박꼬박 말해주었다. 배터리가 없어서 충전하고 바로 연락할게. 나 이제 수업 시작한다, 끝나고 또 문자할게. 그런 것들과… 오늘 날씨는 어떻다느니, 학식이 너무 맛이 없었다느니, 선배들과의 술자리가 끝나지 않아 힘들다느니 하는 메시지들. 다정한 우현인 본인이 특정 상대에게 그렇게까지 구는 이유를 알고는 있을까, 라고 항상 생각했다.

 

평일엔 아르바이트 두 개와 이전처럼 꼬박꼬박 남자의 집을 찾았다. 그에게 실망 같은 걸 안겨주고 싶지가 않아서, 피곤해도 공부를 소홀히 하지 않았고, 남는 시간이면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우려고 노력을 했다. 남자는 매번 직접 단어를 외워왔는지 체크를 해주었고, 토익에서 단어만큼이나 중요한 건 문제의 유형을 파악하는 것이라며 그 두 가지를 중점으로 공부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시험 점수도 중요하지만 실질적으로 필요한 건 회화가 될지도 모른다며 조금씩 회화 공부도 도와주었다. 단조로운 일과를 보고하고 나면 한참 함께 공부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어떤 날은 그 시간이 너무 빨리 끝나버리는 것 같아 아쉽기도 했다.

 

명수 그리고 성열과도 종종 시간을 보냈다. 세 명이 모이는 날이면 고등학생일 적처럼 요란하고 단 한 사람의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수다스러운 시간이 되었다. 성열은 늘 밝았고 매번 한계치를 초과해 술을 먹는 것 같았지만, 그래서 그 밝은 모습 그대로 집에 가곤 했다. 언제나 즐거워 보여서, 기분이 좋아 보여서 성종은 그런 성열의 모습을 보는 일로 즐겁기도 했다. 명수와 둘이 보내는 시간도 많았다. 성열과 함께 저녁을 먹은 날이라든지, 남자의 집에 들렀다 돌아오는 날이라든지. 명수는 성종이 분명하게 싫다고 하는 날이 아니라면 늘 쫓아와 성종의 집에서 자고 가곤 했다. 그건 가끔 아니 거의 대부분 조금은 불안한 일이 되어 성종을 갉아먹고 있었다. 몸을 섞는 일은 왜인지 자꾸만 감정을 건드는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어쨌든 나쁘지 않은 시간들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특별히 아픈 일도, 특별히 슬픈 일도, 특별히 괴로운 일도 없었다. 하지만 삶이란 건 얼마나 모질고 잔인한지. 성종은 그 평화롭던 시간 속에서 왜 단 한 번도 불행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 했는지 후회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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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랜만이죠. 여행 후유증으로 글 쓰기가 좀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번 편은 이렇게 재미가 없나 싶습니다...

 

불안불안한 성종이 지켜봐주세요. 기다려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Posted by Jo_s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