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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06.25 [김유권/이민혁] 한 여름의 극락






한 여름의 극락






1


무릎이 다 헤져 늘어난 추리닝과 발가락을 대충 끼워 넣은 슬리퍼가 빗속을 가른다. 장마의 시작이라고 했나. 잘 보지도 않던 일기예보 내용을 떠올리며 만화방 문을 민다. 아직도 볼 게 남았어? 경이 질리지도 않냐며 그렇게 물으면 볼 게 없으면 본 거 또 보면 된다고 대답하고 만다. 오늘은 필요 없으려나, 생각하고 나와 우산을 펴지 않고 편의점으로 뛴다. 캔 맥주 여러 개를 봉지에 담는 알바생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얼마입니다- 하는 목소리를 뒤늦게 인지하고 네? 다시 한 번 묻는다. 엉기적거리며 주머니에 꼬깃꼬깃 들어있던 지폐 몇 장을 간추려보고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다.

그나마 그 지폐 몇 장으로 위안 삼았는데, 이젠 동전 몇 개가 주머니 속을 뒹군다. 내일부터 본격 연습 시작할 연극에 캐스팅 된 것에 감사하다는 것도 잠시 밀린 카드빚과 공과금 따위들 때문에 한숨이 나온다. 하지만 후회하진 않는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깊지도 않은 물에서 허우적대고 있을게 뻔-하니까. 비가 그칠 줄 모르는 거리 위로 다시 우산을 펴들며 이제는 지폐 대신 오지 않았을 지도 모를 현재로 위안 삼는다.

“들어와.”

양말조차 신지 않은 까치발로 문을 열고 콩콩 뛰어 집안으로 들어가는 경이에게 비닐봉투를 내민다. 발바닥을 종아리에 문대던 경이 맥주? 하곤 웃으며 그것을 받아든다.

“하여튼 김유권. 안주 안 사오는 센스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요.”

“야, 맥주 사고 나니까 천원도 안 남았다. 저번에 먹고 남은 과자 없어?”

주머니에서 뒹굴던 동전 몇 개를 꺼내 보여준다. 그제야 경은 유권을 향해 혀를 쯧쯧 차며 냉장고 문을 연다. 너는 집만 있는 거지야, 거지. 젖은 발을 닦던 유권이 그 말에 웃는다.

“그냥 내 집 팔고 여기서 같이 살면 안 되냐?”

“죽고 싶냐? 안 그래도 좁아서 짜증나는 고만.”

“이사 좀 가라. 대기업에서 주는 월급은 다 어디다 갖다 쓰냐?”

“장가가려고 모아 놨다.”

그 말에 유권이 이번엔 허리를 젖히며 크게 웃는다. 이미 다 누졌을 남은 과자를 가져온 경이 유권의 옆구리를 아프지 않게 찬다. 우습지, 새끼야.

“여자 생겼어?”

“여자는 늘 있지. 회사에 널린 게 나 좋다고 쫓아다니는 여자들이잖아. 심지어는 회사 앞 커피숍 알바생도 날 좋아하는 것 같다니까.”

“너는 장가가기 글렀어, 인마.”

혀를 차는 유권의 말을 들으며 맛없어진 과자를 깨문다. 돈을 모으는 건 이렇다 할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혹시 모를 미래를 위해서다. 조금만 나이 들면 잘라버리고 비정규직 사원을 채용하는 회사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요즘 같은 사회에서 샐러리맨이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그게 다다. 번듯한 대학을 나와 멀쩡한 신체를 가지고도 길거리에 나앉을 수 있으니까. 더 이상은 다른 누구에게도 손 벌리지 않고 살고 싶으니까.

비닐 봉투에서 맥주 캔을 꺼내 따 경의 앞에 놓아준다. 그걸 가만 내려다보던 경이 대뜸 생각났다는 듯 묻는다.

“연극은 내일부터?”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준비 시작하나봐. 거의 완성 됐으니까 완벽해 질 때까지 질리도록 맞춰봐야지.”

“언제까지 할 거냐?”

“…….”

“만화책보다 그게 더 질린다, 나는.”

경이 맥주를 들이키는 걸 보며 따라가던 손이 어떤 사건 혹은 일상 중 한 부분에 도달해 멈춘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줄 알아? 그 똑똑한 머리로 알려줘 봐.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어.

“그 새끼 돌아올 때 까지? 그 새끼 오면 정말 그만 둘 거냐?”

“…….”

“개새끼. 남 인생 망쳐놓고 토끼기는. 사년? 어디 짱 박혀서 잘 산대? 지 혼자 괴로워하다 죽어버리고 그런 건 아니지? 나쁜 새끼. 내가 죽기 전에 그 새끼 찾아서, 시발.”

“곧, 그만 둬야 할지도 몰라.”

“……뭘?”

입술로 맥주를 가져가던 손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 경에 유권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다.

내 무대는 아마 너를 찾고 너를 기다리고 너를 그리워하는 나날들이었던 것 같다. 내가 수년을 두 팔로 갈라왔던 그 일 대신, 떠나버린 너를 되돌리려는 심정으로 시작한 네가 섰던 무대 위의 나. 무대 위의 너를 볼 수 없어서 내가 대신 서보려 했던 것일까. 그래. 그랬는데 지금의 난 그걸로 살고 있어. 너만 있으면 죽어도 살겠다는 그 때처럼.

언제 망설였냐는 듯 맥주를 목구멍으로 넘긴다. 그 이야길 하려 했다. 뭘? 하고 자길 바라보고만 있는 경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민혁이,”

“…….”

“돌아왔다.”






2


비. 이민혁. 비. 이민혁. 여름. 이민혁. 변함없이 올해도 여름이 오고 어김없이 장마가 찾아오고. 올해는 좀 이른데, 싶어 창밖을 내다보면 벌써 비가 오고 있다. 띵동- 초인종이 울려 문을 연다. 여름, 장마, 비가 당연하다는 듯 오고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반가운 얼굴 혹은 불청객이 연달아 찾아온다.

“잘 지냈어?”

“…….”

“유권아?”

사년, 그 긴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변함없는 얼굴. 담담한 눈, 아닌 듯 밝은 피부, 어두운 색의 머리칼, 더 말라 보이는 두 볼. 잘 지냈냐며 웃는 그 얼굴이 숨 막히다. 꿈 꿔왔던 이상? 현실이 아닌 것 같은 현실에 뒷걸음질 친다. 그런 유권을 보며 민혁은 잠시 미안한 눈을 하더니 잠깐 들어가도 되지, 하며 신발을 벗고 유권을 지나친다.

집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좁지만 아담하고, 어느 곳을 보고 느껴도 온통 김유권인 것 같은 따스함마저 변함없다. 조금 무겁게 들고 있던 마트 비닐 봉투를 냉장고 앞에 내려놓고 냉장고 문을 연다. 그 안에 봉투에 담겨있던 것들을 꺼내어 차곡차곡 채워 넣는다. 생수와 주스들, 포장된 김치, 반토막짜리 수박, 팩도 뜯지 않은 달걀, 우유……. 그리고 일어서 냉동고를 열어 아이스크림까지 채워 넣는다. 오래된 냉장고가 근 사년 만에 꽉 차는 걸 실현시켜준 민혁이 유권을 돌아보곤 아이스크림 하나를 들어 보이며 먹을래? 한다.

“뭐, 야……, 너.”

“여기 넣어둘 테니까 꺼내 먹어.”

“야…….”

“무슨 냉장고가 이렇게 텅텅 비었어? 물은 먹고 살았어? 한국인 집에 김치 하나 없고. 쌀은 있긴 해? 그동안 뭐 먹고 살았어? 엉?”

“……그러는 넌 그동안 어디 있었어?”

어디 있었니. 아프진 않았니. 꼬박꼬박 밥은 잘 챙겨 먹었니. 괴로워서 그랬니. 내가 힘든 걸 보기 싫어서 그랬니. 꺼내다보면 끝도 없을 것 같은 질문들 모두 잠시 미뤄두고.

“잠은 잘 잤니?”

안아줘야 했던 그 등, 잡아줘야 했던 그 손, 곁이 아니면 이루지 못하던 잠. 언제부터였을까. 유권의 곁이 아니면 잠에 들지 못해 며칠 밤을 새다 결국 불안한 걸음으로 유권의 집 초인종을 누르던 그 떨리던 손, 품을 껴안던 팔. 이제는 그 팔이 현재의 이민혁이 되어 유권을 향해 벌려진다.

“아니. 네가 없어서…….”






3


학창시절의 나는 아침에 비가 오지 않는 이상 오후에 비가 온다고 해도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하굣길에 비가와도 그냥 맞고 가면 그만이라 가방 따위로 비를 막지도 않고 학교 건물을 벗어날 때면 늘 우산 하나가 그런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비는 맞으라고 내리는 것이지 피하라고 내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모든 비를 다 맞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 우리가 남으로 지낸지 4년이 지났다. 그러나 그 4년 동안에도 우리는 사랑했다.






4


밤이 아득히 깊었다. 민혁이 돌아왔고 근 4년 만에 함께 보내는 밤이다. 돌아가라는 말에 너 없이 못 자는 거 알잖아, 하는 민혁을 유권은 차마 돌려보내지 못했다. 막상 4년 동안 나 없이 어떻게 잠들었냐고 물으려 해도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의 눈이 천장만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다.

“어디, 있었어?”

“……정동진.”

“거짓말하지 마. 나 너 찾으러 거기 갔었어.”

감동인데, 하며 자신을 향해 돌아눕는 민혁에 유권이 울듯한 표정을 짓는다. 나 봐. 다정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못 이겨 돌아누우면 4년을 40년, 400년처럼 여기게 했던, 하루도 빠짐없이 그리워했던 얼굴이 눈 안에 가득 들어찬다.

“보고 싶었어.”

“어디 갔었어?”

“더 멋있어졌네.”

“왜 다시 왔어?”

“나 없다고 죽은 사람처럼 살 줄 알았더니.”

“그렇게 잘 알면서, ……왜 갔어?”

눈물이 나올 것 같은 걸 들키기 싫어 다시 천장을 향해 돌아누운 유권이 억지로 눈을 크게 올려 뜨고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린다.

“견딜 수가 없었어.”

“…….”

“죽고 싶었어. 내가 그런 니 곁에 어떻게 있어. 나 정말 죽으려고 떠났는데,”

유권의 입술이 일그러진다. 새나오려는 신음을 참으려고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이.

“매일, 매일, 누구 생각하느라 죽지를 못했어.”

“…….”

“생각만 해도 가슴이 막, 벅차서.”

“흐윽.”

“그 사람 웃는 얼굴만 떠올리면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서,”

“흐읍, 흑.”

“내가 너무 살아있는 것 같잖아.”

“흐윽, 윽,”

결국 엉엉 울음을 터뜨리는 유권에 민혁이 망설이던 팔을 뻗어 유권의 허리를 감싸 안는다.

“니 옆에서 평생 죄인으로 너 힘든 모습 보며 살 자신이 없었어.”

“끄윽, 내 곁에, 더 있었어야, 하는 거잖아, 너. 흐윽. 그럴수록, 더.”

꺼억, 꺼억 숨이 넘어갈 듯 울며 말하는 유권의 목소리가 가슴을 때린다. 우느라 진정되지 않는 숨 때문에 몸을 들썩이는 유권에 민혁의 몸도 함께 흔들린다.

“흐윽, 끄윽, 왜, 갔어. 흐아앙, 왜, 왜 그랬어어.”

어린 애 마냥 와아앙, 서럽게 울어버리는 유권의 몸을 껴안은 두 팔에 힘이 더 들어간다. 왜 그랬어, 왜 날 두고 갔어. 네가 그러면 안 되지, 너는 그러면 안 되지. 울음에 섞여 힘겹게 쏟아내는 마음들이 가슴이 아파 덩달아 울고 싶은 심정이 된다.

“이제 남은 시간은 너만 사랑하고 살 거야. 사랑해, 유권아. 그 말을 하려고 왔어.”






5


여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직 봄이 다 가지 않은 것처럼 쌀쌀하다. 몸 곳곳의 털이 쭈뼛 서는 것 같고 닭살도 올라오는 것 같고. 습해서 움직이기 싫을 정도로 온몸이 끈적끈적해도 모자랄 판에……. 잠깐 한숨을 쉬다 좁은 베란다 너머로 비가 오는 거리를 내다보고 돌아선다.

연극은 유권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민혁에겐 특별했을까. 이십 평생 중 절반가량을 서왔던 무대. 그 위에서 그가 연기해 온 역할. 그걸 통해 보여 지던 그 자신. 그것을 알고 싶어 4년간을 그 길을 걸어왔지만 아직 아무것에도 도달하지 못한 것 같은 이 허무함. 지금은 어떨까. 아직도 무대 위에 서고 싶어 할까. ‘4’라는 글자만 두고는 짧다면 짧으면서도, ‘기다림’ 혹은 ‘그리움’을 두고는 기다면 긴 그 시간 동안에도 무대에 섰을까. 무엇을 연기하고 싶어 했고 무엇을 표현하고 싶어 했을까. 혹시 그 위에서 진짜 자신을 찾으려 했던 것은 아닐까.

‘무대 위에서 그게 가능하다면 유권아, 난 널 연기해 보고 싶어.’

그게 가능하다면? 난, 보고 싶지 않아. 그 때 그 말을 하던 민혁을 생각한다. 그 때는 그걸 보고 싶다고 생각 했는데. 무대 위에서 김유권이란 사람을 연기하는 이민혁을 보고 싶었는데. 지금은, 지금의 김유권은 그 때의 김유권이 아니니까.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행복했던 일보다 불행했던 일이, 좋았던 일보다 끔찍했던 일이 기억에 오래 남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본인이 자각하지 못해서 그렇지. 내가 잘했던 일을 떠올리려면 잘 생각나지 않지만 실수했던 일, 부끄러웠던 일 따위를 생각하면 바로바로 떠오른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아픈 기억은 말 할 것도 없이 더더욱. 사람들은 그것을 잊으려 노력하고, 잊고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잊히지 않는다.

‘무대를 물바다로 만들 생각이야?’

‘커어-다란 어항을 하나 빌릴까?’

‘어항이 뭐야, 어항이.’

그 말에 하하하, 웃었던 게 생각이 난다. 텅 빈, 아무것도 없는 무대 위에서 그 때의 김유권을 그려보기. 그 때는 무대에서 쉽게 그릴 수 없는 일이라, 지금은 지금의 김유권이 그 때의 김유권이 아니라. 그래서 다시 돌아보기가 두렵고 어려운 일. 떠올리려 하지는 않지만 무심코 생각나면 지울 수가 없는 일. 어쩌면 이민혁은 그 때의 김유권을 무대에 올리고 싶어서 계속 연극을 해왔던 것일까. 그리고 더 이상 그 때의 김유권을 볼 수 없어서 모든 걸 다 버리고 포기하고 홀로 그렇게 사라졌던 걸까.

찰나의 사건, 사고. 무지한 인간. 한계. 사랑. 그리고 죄책감. 유권은 창문을 때리는 굵은 빗줄기의 아우성을 들으며 미소 짓는다. 왜 그랬던 걸까. 이민혁 없이는 볼품없이 죽어갈 김유권을 알면서……. 그건 죄책감을 느낄 일이 아니다. 사랑으로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일이고 죄를 물을 일도 아니다. 그저 행복했던 그 동안에 대한 조금이지만 큰 대가라고 생각하면 그만인 것을. 왜 그랬던 걸까.






6


“그만 좀 웃어.”

잠시 비가 그쳤다. 혹시나 해가 뜰까 해서 급하게 탈수를 마쳐놓은 빨래를 꺼내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불안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여니 아니나 다를까 이민혁.

“왜애. 좋잖아.”

“난 하나도 안 좋아.”

“나랑 같이 있는 게 싫어?”

“…….”

빨래를 탈탈 털던 손이 멈추고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문 그 얼굴이 민혁을 향해 들린다. 크지도 않은 눈을 또릿하게 뜨고 저를 바라보는 그에 못 이겨 고개를 작게 슬슬 젓는다. 그에 민혁이 또 즐거운 듯 웃는다. 이민혁과 빨래 널기라. 안 그래도 좁은 베란다가 더 좁게 느껴진다. 남자 둘이 이게 뭐람.

“어?”

속옷과 양말 따위를 대충 널어놓는데 놀란 민혁의 목소리에 고갤 든다.

“해 나온다, 유권아.”

칙칙했던 베란다가 햇빛보다, 햇빛을 받은 이민혁으로 밝아지는 느낌이다. 4년 만에 느껴보는 화사함. 그게 눈부셔서 눈을 찡그린다.

“해가 오래 떠 있었으면 좋겠다.”

“…….”

“옷 다 마르면 내가 걷어주고 가고 싶어. 그래도 되지?”

저 해가 언제까지 저렇게 떠 있을까. 4년간 질리도록 이 베란다로 비춰 들어오던 것인데 왜 지금은 저 빛이 생소할까. 민혁을 향하던 시선을 잠시 하늘의 해로 돌린다. 그동안 저 하늘과 저 해를 몇 번이나 봤을까. 하늘을 보며 여유로운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이란 걸 할 시간을 가진 적이 있던가. 문득 각박하고 조급하게만 살아왔던 그 삶이 억울해지기도 한다. 울 것 같은 마음으로 다시 민혁을 바라본다. 아직도 유권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얼굴이 햇빛에 반짝인다. 이번엔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그는 또 웃는다. 그 모습이 정말 기뻐 보여서 억울하다.

저 해가 언제까지 얼굴을 내밀고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가능한 한 오래 그래주길 바라며.

“빨래하는 김에 이불도 빨까.”

하여튼 귀찮은 일은 사서 해요. 조금은 신이 난 얼굴로 이불보를 벗기는 민혁을 보며 한숨을 쉬기도 했지만, 굳이 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욕조 안에 이불보를 담그고 세제를 풀고 난 민혁이 먼저 욕조 안으로 들어가 이불을 꾹꾹 밟는다. 몇 번 그러더니 유권을 향해 웃으며 들어오라 한다.

“됐어. 그런 거 안 해.”

“왜애! 얼른 들어와. 너 안하면 나도 안 해.”

“……하여튼.”

삐친 눈을 하고 욕조에서 나오는 민혁에 못 이겨 고집을 꺾인 채 먼저 욕조 안으로 두 발을 집어넣는다. 어정쩡한 자세. 발에 닿아오는 차가움. 잠시 눈을 찡그리다 이런 어색함도 민혁과 함께, 라는 사실을 지각하면 마음 한 구석이 아리다.

민혁이 유권을 따라 들어오려 두 발을 다 욕조 안으로 담그는데 물에 푹 젖은 이불을 밟기가 힘들어 발을 잘못 디뎠는지 크게 휘청거린다.

“어, 어?”

외마디 비명과 함께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민혁을 붙잡은 유권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욕조 모서리 귀퉁이에 앉아버린다. 민혁의 고개가 유권의 어깨에 걸쳐지고, 몸도 무겁지 않게 유권 쪽으로 기대진다.

맞닿은 가슴팍 사이로 교차하는 갖가지 감정. 그 안에 숨겨진 두 사람의 아릿한 진심들.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나야 그것들이 서로에게 온전히 전해질까. 길지 않은 정적이 이어지던 사이에 민혁의 두 팔이 유권의 등을 끌어안는다.

“권아.”

멈춰있던 손이 천천히 올라와 민혁의 등을 토닥인다.

“권아.”

가슴으로 들리는 듯 울리는 목소리에 눈을 감는다.

“김유권.”

“…….”

“미안해.”

진심. 내 진심이야. 그 떨리는 목소리가 그렇게 말한다.

앞으로의 나는 모두 진심이야. 너를 향한 나는 모두 진심이야. 예전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다시 시작이야. 지금의 나는 네가 기억하는 그 이민혁이야. 그러니까 우리 다시 돌아가자. 얼마나 긴 시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돌아가자. 그 때의 너와 나로 말이야.






7


딱히 고등학교 때 친구가 성인이 되어서까지 오래 갈 거라고 믿어 본 적은 없다. 졸업하고 각자 살기 바빠지면 그러다 말겠지. 혹은 계속 연락하고 살면 가끔 얼굴 보는 게 다겠지. 몇 년을 지내왔더라. 고등학교 3년. 그 후 6년. 느껴온 것과 생각했던 것 보다 긴 시간이다. 티격태격 싸우기 바빴던 그 사이가 이렇게까지 이어져 왔을 줄이야.

“돈도 없으면서 술을 사긴 뭘 사.”

“알면서 얻어먹으러 나온 너는 뭐냐.”

“불쌍해서 이 형님이 쏘러 나왔다.”

“야, 남자가 한 번 뱉은 말은 무르는 거 아니다. 그러니까 오늘 박경 장가가려고 모아 둔 돈 다 털어볼까?”

그 장난스런 말에 경이 유권의 배에 주먹을 내다꽂는 시늉을 한다.

마주보고 앉아 있다 맥주가 나오는 걸 보며  경이 묻는다. 여전히 시선은 테이블로 올라오는 맥주에 고정한 채로.

“무슨 일 있어? 왜 이렇게 담배를 피워대.”

“일은 무슨…….”

“연극 잘 안 되냐?”

“잘 되서 탈이다.”

“그럼 왜? 빚이 많아서 힘드냐?”

“갚아줄 거 아니면 닥치고 있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끈다. 경이 그 손을 가만 보다가 다시 입을 연다.

“이민혁 때문이냐.”

맥주잔으로 가져가던 손이 조금 진동한다. 맞네. 경이 흘끔 유권을 보곤 한숨을 쉰다. 너희 집에 있어? 아니, 걔 사촌 누나 오피스텔에. 뭐하고 산대? 별 일은 없나봐. 눈 뜨면 우리 집 왔다가 눈 감기 전에 가더라. 4년 전 그 때부터 경은 민혁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 전까진 친구로서 그리고 친구의 연인으로써 친하게 지냈지만.

“왜 왔대?”

글쎄. 나도 그게 궁금해. 사실은 알고 있다. 자신이 아직 그를 사랑한다는 걸, 그리고 그도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마음, 이유, 모든 걸 알면서도 모르고 싶다.

대뜸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는 유권에 놀란 경이 커진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유권의 손목을 잡아 멈추게 한다. 서로가 서로를 잘 알기 때문에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라.

‘내가 제일 서러웠던 게 뭔지 알아?’

‘…….’

‘부모 없다고 놀려대는 새끼들.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그 새끼들 한 대씩 치지도 못했다. 학부모 총회나 공개 수업하는 날이 제일 싫었어. 열 살, 열한 살 먹은 것들이 뭘 안다고 우리 할머니에 대해서 지껄여. 나한테 얼레리꼴레리 하면서 손가락질 하는 것보다 그 새끼들이 울 할머니 흘겨보는 게 더 싫었어. 그래서 한 번은 할머니한테 학교 오지 말라고 소리 지른 적도 있었다. 그날 하교하고 할아버지한테 종아리를 얼마나 맞았는지 알아? 지금 생각해도 아프다. 근데 그 날 밤에 그 종아리에 약 발라준 게 할머니야. 할머니 쪽팔리다고 대느는 손주 새끼 뭐가 예쁘다고…….’

‘…….’

‘야, 박경.’

‘…….’

‘왜 니가 질질 짜, 새끼야.’

그 땐 그저 울기만 하던 경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난 어느 날 뜬금없이 그 얘길 다시 꺼냈다.

‘그래도 넌 할머니 손에 키워진 걸 고마운 줄 알아야 해. 난 친할머니, 친할아버지 다 돌아가시고 외할머니는 나 맡기 싫다 하시고……. 그러다 결국 친척들 집에 돌아가면서 얹혀살았다. 전학만 몇 번을 했는지, 시발. 나는 부모 없다고 나를 놀릴 친구도 없었어. 아무도 내가 어떤 앤지 모르니까. 고등학생 되어서야 고모들이 돈 모아서 이 집 해줘서 겨우겨우 정착했지. 그러고 보면 너나 나나 참 병신 같이 살았다.’

딱히 비슷한 처지에 있는 친구를 사귀려고 했던 건 아니었는데. 그러면서 유권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 눈가에 맺힌 눈물이 떨어질 듯 말 듯 일렁이다가 찬바람에 금세 식어버리고.

‘그러니까 열심히 살 수 밖에 없어. 환경이 아무리 좆같아도 보란 듯이 살아서 보여줘야지. 내가 박경이다! 하고…….’

‘너는 좋겠다, 공부라도 잘 해서 대학 잘 갔잖냐.’

‘우리나라에 성적, 대학 이딴 걸로 먹고 사는 사람 얼마 없다. 다 형식적인 거야. 그냥 좋은 대학 나오면 취직 잘 해서 오래오래 잘 먹고 잘 살겠지? 잘 먹고 잘 살긴 뭐가 잘 먹고 잘 살아. 내가 그렇게 뼈 빠지게 공부 했어도 결국 월급쟁이 밖에 못 돼. 너는 복 받은 줄 알아. 수영 국가 대표 쉬운 줄 아냐.’

‘말이 국가 대표지. 금메달 아니면 알아주지도 않잖아.’

‘아직 시작도 안 했으면서 벌써부터 엄살 피우기는. 금메달이 목표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얼굴이 되는 걸 목표로 해라. 너, 수영 잘 해.’

고작 스무 살.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버려서 안 된다는 걸 아는 건 미리 포기하고 봐야 했던 둘. 가난하고 용기도 없어 하던 일은 절대 그만 둘 수 없는 둘. 다른 일을 찾기엔 이미 늦었다는 걸 절실히 아는 둘. 그래서 결국 의지할 친구라곤 서로 밖에 없다는 걸 아는 두 사람의 수년간의 우정.

제 손목을 잡은 경의 손을 잠시 바라보다 맥주잔을 내려놓고 입을 연다.

“민혁이가…… 그 새끼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데,”

“…….”

“그게 다 진심이라는 걸, 내가 알아. 그래서 차라리 내 손으로 걜 죽여 버리고 싶어.”






8


뭐가 그렇게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민혁아. 미안해, 유권아.

빨래를 다 마치고 거실 소파에 앉아있는 유권의 무릎을 민혁이 베고 눕는다. 좋다. 그 말에 씁쓸히 웃는 유권의 얼굴이 약간 일그러진다. 슬프게.

“잠들려 할 때 얘기해 줄게. 그러니까 자장가 불러줘.”

“애도 아니고 무슨…….”

“불러줘.”

벌써 어색해 진 걸까. 예전엔 이런 일이 익숙했는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가슴팍을 도닥여주며 가끔 자장가를 불러주곤 했는데. 그럼 잠들기 전의 민혁은 늘 행복한 표정으로 유권아, 사랑해. 그런 일들이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자장자장 우리 아가…… 자장자장 잘도 잔다…….”

“……뭐해?”

“가사를 모르겠어.”

“바보야? 딴 거 불러줘.”

안 불러줄까 보다! 하며 민혁의 머리를 잔뜩 헤집어 놓은 유권이 다시 목을 가다듬는다. 흠, 흠.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

“아이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만족스럽다는 듯 꼭 감긴 민혁의 눈이 웃는 모양이다. 유권이 느리게 노래를 이어가고 집 안엔 그 목소리 외에 다른 무엇도 끼어들지 않는다. 마치 침범할 수 없는 대지의 어느 황량하고도 평온한 영역처럼. 그리고 그 위에 자리한 부서질 듯 위태로운 두 사람.

“첫째는……,”

“잠이 드읍니다…….”

“나 때문에 너 수영 못하게 된 거.”

잔뜩 망설이다 열리는 입술을 가만 바라보다 제가 헝클어뜨린 머리칼을 차분히 정리해 준다. 괜찮아. 너를 잃었던 것에 비하면 어깨 하나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아.

“두 번째는,”

“…….”

“말도 없이 혼자 사라져서 연락 한 번 없다가 갑자기 돌아와서 너 힘들게 한 거.”

“나 힘들게 한 거 알긴 알아?”

“응. 미안해.”

그간의 고충이 미안하단 한 마디로 씻겨 내려가는 듯하다. 그 큰 시간이 이 작은 단어 하나로 모두 다. 억울한 마음이면서도 행복한 심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더 있어?”

“응. 근데 졸리다.”

“괜찮아. 차근차근 천천히 얘기 해.”

고른 숨만 쉬던 민혁이 왼손을 들어 올린다. 잡아 줘. 미세하게 떨리는 두 손끝과 손끝이 맞닿았다가 손 하나가 다른 손을 움켜쥔다.

손바닥으로, 손가락으로 너를 느껴볼래. 네가 내게 하고자 하는 말들, 전하고자 하는 감정들.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다. 그리고 더 이상 놓지 않을래. 내가 사랑했던 너를, 그리워해왔던 너를, 사랑하는 너를.

“아빠랑, 할머니가…… 간암으로 돌아가셨어. 재수 없게…… 나도 유전적인 영향 때문에,”

“……민, 혁아.”

“4년 전에, 그 일 있기 며칠 전에, 무심코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나도,”

“……."

“간암이래. 초기였어. 근데, 차마 수술할 돈도 없고……. 지금쯤이면 거의 말기겠다. 돌아오기 전에, 다시 검사 받았었어. 진행이, 빨라지고 있나봐. ……떠나기 전에 네 얼굴이라도 봐야겠다 싶어서…….”

“왜…… 왜 그랬어, 왜…….”

“네가 날 내쳐도, 얼굴만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고마워.”

그 얼굴이 당장이라도 죽어버릴 것처럼 혹은 꼭 죽은 사람처럼 고요하고 평온하다. 그래서 불안하다.

“그 때, 그 일, 일어났을 때, 너무…… 죽고 싶었어. 어차피 나는 죽어도 되니까, 그렇게 죽으나 암으로 죽으나 똑같으니까, 차라리, 네가 아니라, 나였어야 한다고 생각했어.”

졸음이 몰려오는 듯 말이 느려지고 목소리가 나른해 진다. 다 이야기하고 잠들고 싶은데. 그리고 다시 사과하고 싶은데. 남은 시간은 모두 너와 함께하고 싶다고 말해야 하는데. 뜨거운 눈물이 잠으로 빠져드는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진다.

“세 번째는……, 내 맘대로 아파서.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먼저 떠나야 할 것 같아서…….”

“…….”

눈물을 계속 흘리면서도 터지려는 울음을 참으려는 듯 어금니를 앙 물고 목으로 흐느끼는 소리만 얕게 뱉는다. 마주 잡은 손이 힘이 잔뜩 들어간 채 부들부들 떨린다. 민혁이 떠난 후 그 빈자리를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외로움, 공허함. 친구로서 함께 해 온 시간들, 가족으로써 곁에 있어준 시간들, 연인으로써 사랑해 온 시간들. 모든 게 꿈이었던 양 놀리듯 스쳐 지나가면 저릿해 오는 텅 비어버린 가슴. 그걸 치유 받을 수 있는 곳이 없어 떠돌다, 과거의 민혁의 모습을 찾기에 머물다, 결국 정착한 미련한 마음. 이제 그만둘까 했는데 계속 해야만 할 것 같다.

“미안해.”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하고 유권이 빗소리에 묻힐 법한 크기로 흐느껴 운다.






9


주어진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연극을 상연할 날은 다가오고 연습량은 늘어가고 몸은 지친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이번엔 예상치 못한 변수에 조금의 스트레스가 가미되었다. 그리고 민혁이 언제까지 곁에 있을지 모른다. 빠르면 내일이 될 수도 있고 늦으면 내년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훨씬 더 긴 시간이 될지도 모르지만.

“나랑 하고 싶은 일 없어?”

“너랑?”

물음에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씩 웃으며 한 팔을 뻗는다. 손을 잡아달라고? 연습이 있어 나가려고 옷을 입던 유권이 침대 위에 앉아있던 민혁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무방비 중에 가해진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풀썩 침대 위로 쓰러진다.

“야!”

“이건 어때?”

순식간에 유권을 깔고 앉은 민혁이 어깨를 두 팔로 눌러 유권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여전한 미소로 내려다본다. 당황한 유권이 몸을 일으켜보려 어깨를 비틀어 움직이지만 소용이 없다. 그리고 잠시 포기한 것 같더니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양팔을 들어올린다.

“뭐해? 아하, 하하하.”

갈비뼈가 있는 부분을 간질이자 민혁이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 하지만 몸에서 전혀 힘을 뺄 줄 모른다. 힘이 이렇게 셌던가, 생각하며 계속해서 간지럼을 태워보지만 몸은 꿈쩍도 안 한다.

“너 뭐야!”

“김유권 바보야. 나 간지럼 안타거든?”

헐…… 하고 추락하는 유권의 양팔이 썩은 나뭇가지 같다. 즐거운 듯 웃던 민혁이 유권의 앞머리를 넘기더니 그 이마에 입을 맞춘다. 그리고 코, 볼, 입술…….

“지금은 안 돼?”

“정말 하고 싶은 게 이거야?”

“이거? 이거가 뭔데?”

“그, 뭐냐…… 그거 있잖아, 그거.”

“그거는 또 뭐야. 제대로 설명 좀 해봐.”

까르르 웃는 민혁에 여전히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유권은, 조곤조곤 움직이는 민혁의 입술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더운 숨을 몰아쉰다.

“유권아. ‘그거’가 뭐야? 혹시, 이런 거 말하는 거야?”

놀리듯 말하던 민혁이 한 팔을 갑자기 움직이더니 등 뒤로 슥 가져가 유권의 허벅지에 척 갖다 댄다. 이에 놀란 유권의 다리가 기계 마냥 자동 반사적으로 번쩍 들린다.

“이민혁!”

“어? 이게 아닌가? 그럼 이건가?”

아이 같은 미소를 지어보인 민혁의 손이 이번엔 유권의 엉덩이를 손에 쥔다.

“야, 야! 뭐해! 하지 마. 하지 마, 이민혁.”

“왜애? 너랑 하고 싶은 거 물어봤잖아.”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미간 사이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몸이 못 참겠다는 듯 침대 위를 반 바퀴 구른다. 막아보지도 못할 사이 뒤바뀌어버린 배치에 민혁이 놀라 몸을 마구 움직여보지만 소용이 없다.

“진짜지?”

“무거워, 권아.”

“진짜 나랑 하고 싶은 거 맞지?”

“아파, 아파!”

애교를 섞어 인상을 찡그린 민혁이 유권에게 휘어 잡힌 손목이 아프다며 비튼다.

“대답 해봐. 진짜지?”

“진짜야, 진짜. 그러니까 이것 좀 놔줘.”

“너 나중에 딴 말 하기 없기다.”

“오늘 밤에 해, 오늘 밤에. 약속, 약속!”

입 꼬리를 끌어당겨 웃은 유권이 손에 힘을 빼 흰 손목을 느슨하게 잡고 민혁의 이마에 살짝 키스한다.

“금방 올게.”






10


이곳은 이민혁이 끝없이 서있는 우주다. 새카맣지만 그것만큼은 유일하게 빛나는 우주다. 그 외에 존재하는 것이라곤 김유권 밖에 없는 우주다. 그래서 떠날 수 없는 우주다. 그 우주는 무대다. 내가 웃고 울고 걷고 뛰고 호흡하는 무대다.

시작하기 전 늘 그렇게 생각하고 무대에 선다. 무대에는 늘 4년 전의 이민혁이 서있다.

나는 무대에서 이민혁과 연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민혁을 연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유권이 연극을 시작한 이유는 오로지 이민혁 때문이었다. 민혁이 사라지고 그 대신 그를 연기하고 싶어서, 그가 느꼈을 무대 위의 전율을 경험해 보고 싶어서. 혹은 그가 곁에 있을 땐 함께하지 못했던 무대 위에 늦게나마 합류하고 싶어서, 사라진 그를 대신해 상대가 되어준 사람에게 최선이고 싶어서. 어떤 것이 진짜 유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인생의 반 이상을 해온 일을 할 수 없게 된 그에게 있어서 ‘연극’이란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과도 마찬가지였다.

왜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오는 거야?

사고로 어깨를 잃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소중하다 여겼던 민혁도 떠났다. 민혁이 활동하던 대학 연극 동아리의 공연이 소극장에서 있었다. 유권은, 총 세 번의 공연 중 마지막 공연은 객석에 앉지 않고 출연자 대기실에 있었다. 민혁이 마지막 공연은 관객으로서가 아니라 연인으로서 뒤에서 응원해 주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민혁의 무대가 진행되던 중 무대 뒤가 소란스러워졌다. 조형물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무대 바로 밖에서 민혁을 지켜보던 유권이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조형의 구조물과 조명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막 떨어지려는 그것들에 머릿속에 스파크가 일었다. 무엇도 개의치 않고 무대 위로 달려들었다.

“이민혁!”

“……권아!”

외마디 비명과 날카로운 혹은 둔탁한 위험함 따위가 민혁의 목소리로 이루어지던 공간을 갈랐다. 이제 남은 것은 어깨의 고통과 이민혁 뿐이었다.

미련하게도 또 그 때를 회상하며 무대에 오른다. 일상이나 마찬가지면서도 삶에서 모조리 지워버리고 싶은 그 때 그 날들. 4년 전 그 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난 어떤 행동을 할까. 이어마이크를 만지던 유권이 슬쩍 웃는다. 똑같겠지. 너를 구할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던지겠지. 그게 이민혁을 사랑하는 김유권이니까. 시간이 지나도 그건 변하지 않는 거야. 그건 진심이야.






11


연습이 끝났다. 몸이 잔뜩 지쳐 걸음이 느려지고 팔다리가 축축 쳐지는 느낌이다. 이렇게까지 피곤했던 적은 없었는데. 너무 무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돌아갈 길이 없으니까. 그리고 그만두려했지만 계속해야 할 것 같으니까. 아마도, 머지않아 평생을 이 길에 몸담아야겠다는 결심 혹은 다짐을 하게 될 것 같다.

비에 젖은 우산을 펼친 채 계단에 두고 경의 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틈만 나면 왔었는데 민혁이 돌아온 후론 그러질 못했다.

“비밀번호 안 잊어버렸냐.”

삐친 건지 섭섭하단 말투로 물어오는 경에 그저 허허 웃고 만다.

“어차피 너도 바쁘잖아. 내가 자주 놀러와 봤자 귀찮기만 할 테고.”

“알긴 아네.”

딱히 진심이 아닌 변명거릴 대충 늘어놓으면 그게 진심이 아니란 걸 잘 아는 경은 그런 식으로 말하며 중요하지도 않고 시시한 문제는 그대로 끝낸다.

“왜 왔냐. 비도 지지리도 많이 오는 구만.”

“그냥. 박경 잘 살고 있나 해서.”

“웃기지도 않네. 너 죽어도 멀쩡하게 잘 살 거니까 걱정 말고, 죽고 싶을 때 죽어라.”

“나 죽으면 너 엉엉 울면서 따라 죽으려고 할 거 다 알거든?”

“이게 진짜 생사람 잡네.”

뭐라도 씹은 표정으로 유권을 쳐다보는 눈이 잔뜩 빈정 상해 있다. 하지만 그게 다 장난이란 걸 서로가 뻔히 알아서 결국 웃어버리고 만다. 앉아. 소파 위 제 옆을 툭툭 치며 말하기에 유권은 현관 앞에서 어슬렁거리던 자신을 발견하고 그 옆으로 가 앉는다.

“걔는 잘 사냐?”

“민혁이?”

“…….”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린다. 궁금 하다기 보단 그냥 예의상 묻는 것 같다.

“그냥 저냥 지내지.”

“…….”

“경. 너 아직도 민혁이 밉냐?”

“……."

“네가 그랬잖아. 돌아오기만 해보라고. 감방 들어가는 일이 있어도 네 손으로 죽일 거라고.”

“그걸 믿냐.”

“구라였어? 난 네가 날 너무 끔찍이 생각해서 진심으로 하는 소린 줄 알았더니.”

그 말에 경이 혀를 끌끌 차며 한심하단 눈으로 유권을 쳐다본다. 어쩌면 진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친하게 지내는 소중한 친구가 있는 거라곤 김유권 뿐인데, 그 친구가 사랑했던 놈이 말도 없이 짐만 안겨주고 훌쩍 떠났으니 화가 날 수밖에. 죽이지는 못할망정 눈에 띄기라도 하면 멱살이라도 잡고 한바탕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엔 그랬어. 그랬는데…….”

“…….”

“지금 너 보니까 그게 아닌 것 같더라.”

“…….”

“예전엔 연습이나 공연 하루 하고 나면 다 죽어가는 사람 같더니 지금은 힘들어 보이긴 해도, 네 얼굴에 행복하다고 쓰여 있어.”

“……."

“이번 네 공연 보러 가면 왠지 네 모습이 즐거울 것 같다.”

“박경…….”

“이제야 좀 사람 같다고, 김유권.”

웃는 듯 마는 듯 애매한 표정으로 유권을 바라보는 경의 눈가가 약간은 촉촉해지는 것도 같다. 이민혁 한 사람으로 생기를 되찾은 제 친구가 밉다가도 고맙고 다행스럽다. 한 땐 저러다 정말 죽어버리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사람 인생이란 게 오래 살고 봐야 아는 일이라고. 언젠가 어디선가 주워들은 그런 푸념 같은 말도 떠오른다.

경의 말에 유권도 제 과거를 돌아보며 언젠가 민혁이 했던 말을 떠올린다.

‘유권아. 네가 그 두 팔로 헤엄쳐 도착한 곳이 결국엔 나였으면 좋겠어. 국가대표도 되고 상도 많이 받고 인기도 많아지고, 그거 다 이루고 마지막에는 멋지게 내게 도착하라고 내가 응원할게. 언제나 네가 닿길 원하는 결승점이 나였으면 좋겠다.’

늘 결승점에는 민혁이 서 있었다. 변하지 않을 사랑이란 마음으로 환하게 웃으며. 그의 말대로 유권 역시 이민혁이라는 결승점에 닿길 원했다. 200m가 되었든 1200m가 되었든 그 역시 같은 마음으로.

더 긴 거리가 되더라도 절대 지치지 않고 헤엄쳐 갈게. 그 곳에만 머물러 주라. 내가 언젠가, 손끝부터 시작해 너에게 도달할 수 있게.






12


더운 햇빛이 거실을 가득 채운다. 더위에도 불구하고 잠시도 떨어질 줄 모르는 두 사람이 거실 바닥을 자리하고 있다. 유권이 민혁의 위에 올라타 있고 거실에 고통의 소음이 퍼진다.

“야! 아파! 아프다고!”

“가만히 좀 있어봐.”

민혁이 유권을 때리며 다시 소리 지른다.

“아파아! 살살 좀 해, 김유권.”

“야. 나도 힘들거든?”

유권의 아래 깔려있는 민혁이 잔뜩 인상을 쓰고 있다.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 있다. 이제 그만 해애……. 고통이 가득 담긴 목소리에 괜히 해달라고 했나보다는 후회가 담겨있다.

“아악!!”

“어때? 좋아?”

“죽……, 여 버릴 거야. 김유권.”

왜 그러지, 이상하다. 유권이 자세를 다시하고 한 번 더 힘을 준다.

“야아아아! 살살, 좀 하라고…….”

“많이 아파?”

“너 몸에 힘 좀 빼. 나 허리 끊어질 것 같아…….”

“미안, 미안.”

“아악! 아파! 야, 너 그만 내려 와. 나 안 할 거야.”

민혁의 허리를 깔고 앉아 안마를 해주던 유권이 기가 죽어서 내려와 앉는다. TV에서 보니까 이렇게 해주던데. 이게 아닌가. 잠시 뒷머리를 긁적이던 유권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벌떡 일어서더니 발을 들어 민혁의 등을 꾹꾹 밟는다.

“이건 어때? 시원해?”

“악! 으악!”

“더 세게 밟아줄까?”

“주…… 죽, 일 거, 야, 너. 아악!”

본인이 먼저 죽어버릴 듯 말하는 목소리에 유권이 같지도 않은 안마를 멈추고 민혁의 옆에 똑같이 눕는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가 아까도 그만하라고 했지.”

“도대체 뭘 했기에 근육이 이렇게 뭉쳐.”

비스듬히 서로를 바라보며 누워있다. 민혁은 유권을 조금 노려보듯이, 유권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싱글벙글 한 채.

“이리 와.”

유권의 팔이 민혁을 향해 펼쳐진다. 민혁은 입술을 조금 삐죽이다 몸을 반 바퀴 굴려 유권에게 밀착한다. 민혁의 등을 양팔로 끌어안은 유권이 그 어깨에 고개를 묻고 색색 숨 쉰다.

“아팠어?”

“그럼 안 아프냐!”

민혁이 세게 몸을 밀자 포개진 두 개의 인영이 거실을 한 바퀴 구른다.

“힘도 뺀 김에 밥이나 해주라.”

이번엔 유권이 몸에 힘을 줘 반대 방향으로 구른다.

“내가 네 식모냐”, 또 다시 유권 쪽으로.

“밥 안 주면 너 잡아먹을 거야”, 또 다시 민혁 쪽으로.

“먹어 봐, 먹어 봐.”

다시 반대쪽으로 뒹굴려는데 유권이 몸에 잔뜩 힘을 주고 굴러가지 못하게 막더니 민혁의 몸을 끌어안은 채 엉기적엉기적 일어난다. 서로를 끌어안은 두 개의 몸이 하나의 힘에 이끌려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때 듯 움직인다.

“어디 가, 권아?”

“침대.”

“왜?”

저도 모르게 따라 뒷걸음질 치던 민혁이 유권의 대답에 걸음을 멈춘다.

“잡아먹으라며.”

그리고 질질 끌려간다.






13


“공연 언제 해?

“다음 주.”

“벌써? 왜 말 안 했어?”

“때 되면 공연 보러 오라고 하려 그랬지.”

“바보야. 너 힘들 텐데 내가 너무 못 살게 굴었잖아.”

“알긴 아네.”

장난스런 유권의 말에 민혁이 뾰로통해 지다가도 시간이 꽤 많이 지났다는 걸 지각한다.

“니 자리 이미 구해뒀으니까 걱정 마.”

“브이아이피 석 아니면 안 앉는데?”

“내가 이래봬도 주연이거든? 당연히 젤 잘 보이는 자리지.”

민혁이 그런 유권의 엉덩이를 두어 번 두드리며 잘했어요, 우리 유권 어린이. 그런다.

“우리 오랜만에 영화나 보러가자.”

오랜만에? ‘오랜만’이라는 기준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잡고 하는 말일까.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영화를 보았던 그 날로부터 시작하면, 족히 4년은 지나버린 지금. 오랜만에, 아주, 아주 오랜만에. 유권은 조금 슬픈 기분이 되어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영화를 볼 지 잠시 고민하다 민혁이 영화 홍보물을 가리키며 묻는다.

“공포 영화 어때? 여름이니까 당연히 공포영화지.”

“공포영화? 그, 그래.”

“왜? 별로야?”

“아니, 아니야.”

얘가 왜 이래, 하는 표정으로 잠시 유권을 쳐다보다 곧바로 표 두 장을 구입한다. 팝콘, 팝콘. 하는 모습이 귀여워 유권은 그저 민혁의 뒤를 졸졸 따라갈 뿐.

그 때도 그랬었나. 영화는 언제나 네가 고르고, 늘 너는 팝콘을 사고. 다 마셔버리고 얼음만 남은 콜라 컵을 흔들다 스크린을 바라보는 내 눈치를 힐끔 보고 내 콜라와 네 콜라를 슬쩍 바꿔가던 너. 다 알고 있었어. 네가 고른 영화보다 네게 더 집중했으니까. 귀여운 네 모습을 나 혼자만 알고 오래오래 지켜보고 싶어서 모른 척 했어.

지금까지는 추억이란 게 가슴 아픈 일 밖에 아니었다. 곁에 없는 사람을 회상하기란 게 쉬운 일이 아닌데도 계속 떠오르고, 잊기는 더 힘들고. 결국은 나는 너를 못 잊어, 하고 인정해 버리면 남은 건 초라한 자신뿐이었던 한 때. 그 때로 다시 돌아가는 일은 이젠 죽기보다 싫다. 그 때는 회상하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면 지금은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니까. 오래 전 생각에 입가에 미소가 뜬다.

영화를 보는 내내 유권의 손이 떨렸다. 팝콘을 흘리고 콜라를 마시는 손이 부들부들. 심지어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려다 콜라를 엎지를 뻔도 했다. 영화는 공포라기 보단 잔인한 요소가 많았다. 살과 뼈가 댕강 잘려나간다던가 하는 그런 것들 말이다. 민혁은 조금 인상을 쓰면서도 나름대로 재미있게 보는 반면 유권은 다 죽어가는 사람 같다.

“유권아, 왜 그래. 너 표정 꼭 울 것 같아.”

비위가 약했었나? 원래 공포 영화 같은 거 잘 못 봤었나? 그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유권이 잔뜩 겁먹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묻는다.

“소, 속이 좀 안 좋네. 콜라, 콜라를 너무 많이 마셨나봐.”

유권의 컵을 살짝 밀어 본 민혁이 묵직함을 느끼며 피실 웃는다. 그 뒤로도 유권은 서랍의 수납 칸이 사람의 힘없이 갑자기 튀어나온 다던가, 종이가 공중을 떠다니는 것에도 크게 내색하진 않았지만 꽤나 놀라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민혁은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티내지 않고 웃느라 시간을 보냈다.

영화가 끝났을 때 쯤 유권의 표정은 시트에 오줌이라도 지린 듯 창백한 얼굴이었다. 민혁이 그런 유권을 보며 결국엔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그래. 웃어라, 웃어.”

“그게 그렇게 무서웠어?”

“그럼 안 무서워? 잘 걷던 사람이 갑자기 차에 치여서 죽어버리는데, 안 무서워?”

“하하하하.”

“우리도 이렇게 걷다가 갑자기 퍽! 치여서 슝! 날아가서 죽을 수도 있다고.”

“영화는 영화야, 권아. 으이그, 귀여워.”

손을 들어 유권의 볼을 살짝 꼬집고 흔든다. 그에 유권이 발끈 한다.

“하지 마. 이런 거 하면 나 귀여워서 지나가는 여자들이 다 쳐다본단 말야.”

“얼씨구.”

“절씨구.”

동시에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크게 웃어버린다.

“나 없는 동안 다 큰 줄 알았더니 아직 덜 컸네, 우리 유권이.”

네가 없는 동안의 나는 이제 없어. 4년여의 시간은 이제 없어. 그저 잠깐 시간이 멈췄다가 다시 시작된 거야. 네가 없으면 난 아무 것도 아니야. 그저 빈껍데기일 뿐이야. 마음은 널 쫓아가버린 빈껍데기 말이야. 네가 있어야 내가 존재 해. 그것만이 진실이야. 네가 없이는 내가 살 수가 없어. 그동안 난 숨만 쉬었지 살아있던 게 아니었어.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 않고 유권이 과감하게 민혁의 손을 잡는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언제 바닥을 드러낼지 모르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욕심낼게. 입술을 꾹 다문 채 앞만 보는 유권을 쳐다보다 민혁이 그 옆으로 더 바짝 붙어 선다.

“아닌가? 다 컸나?”

“네가 원하면 지금 보다 더 클 수도 있지.”

“그럼 이렇게 내 손 잡고 걸어주라.”

그게 뭐가 어렵다구, 하며 웃으며 돌아보는 얼굴이 좋다. 단단히 잡아 쥔 손이 좋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사랑한다는 너의 마음이 좋다. 당당하자. 누구나 한번쯤은 하는 사랑을 하는 중이니까. 그 방향이 조금 다르더라도 기죽지 말자. 세상엔 오른쪽 길도 있고 왼쪽 길도 있으니까. 우리는 그저 남들이 왼쪽 길이라고 정해놓은 오른쪽 길을 걷고 있을 뿐이야. 사랑은 다 똑같으니까. 너와 나도 결국은 사랑을 하는 사람이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만큼은 무엇에도 방해 받지 말고 사랑하자. 그래, 그러자.

“네가 놓지 않는다면 평생이라도 이렇게 걸을 수 있어.”






14


“진짜 이민혁이네…….”

“그럼 가짜 이민혁도 있냐?”

포장마차 안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던 경이 유권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민혁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다 꿈이라도 꾸는 양 중얼거렸다.

“박경.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어쩌면 저 자식은 저렇게 변함없고 한결같고 뻔뻔할 수 있을까. 그 때의 그 미워하는 마음들이 남아서 경은 차마 밝게 웃으며 인사하진 못하고 얼떨떨한 기분으로 그를 맞는다.

“어떻게 이 새끼는 변한 게 하나도 없냐.”

“그래서 더 반갑지? 나도 내가 예상했던 미래의 네 모습이 지금의 네 모습이라 더 반갑다.”

“뭘 예상했길래.”

“어디서 샐러리맨 냄새가 나네.”

코를 킁킁 거리는 민혁을 보며 유권이 호탕하게 웃는다. 경은 차마 웃지는 못하고 눈썹을 약간 꿈틀 거리다 소주병을 든다.

“받아라.”

“박경이 사는 거야?”

“니 애인이 돈이 없으니 샐러리맨이라도 되는 내가 사야지.”

“오오- 박겨엉-.”

소주잔을 들이밀며 민혁이 웃는다. 그리곤 안주 딴 것도 시키면 안 돼? 하며 물었다가 째려보는 경의 눈에 다시 입을 꾹 다물고 만다.

샐러리맨 인생 참 슬프네. 낮게 중얼거린 경이 유권의 잔도 채워준다. 그렇게 몇 잔을 주고받다 보니 유권을 제외한 두 사람 모두 몸이 다 비틀거려 의자에 앉아 중심 잡기가 힘들 정도로 취해버렸다. 전에도 셋이 술을 마시면 꼭 이렇게 대책 없이 취해버리는 두 사람 때문에 늘 한두 잔 마시고 마는 유권이었다. 4년이나 지난 지금도 주량이나 술버릇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야, 이민혁 이 나쁜 새끼야. 니가 얼마나 잘났길래 말도 없이 김유권을 떠나? 엉?”

“그래서 지금 내가 어? 백 배 천 배로 잘하고 있잖아.”

“니가? 유권이 새끼가 만 배로 잘하면 잘했지, 니가 뭘 잘해, 이 새끼야.”

“잘하고 있거든? 니가 봤어? 봤어? 봤냐고-오.”

혀가 꼬여 발음까지 꼬이는 것은 기본이고 몸까지 꼬이는지 거의 식탁에 엎어지듯 기대 앉아 있다. 똑바로 들지 못하고 제 멋대로 움직이는 고개를 한 채 간신히 팔을 움직여 서로가 있다고 알고 있는 방향으로 손가락질을 한다. 경이 소주 한 잔을 또 들이키고 잔을 탁 내려놓자 오기가 생긴 민혁이 힘없는 팔을 뻗어 제 잔을 또로로 채운다.

“야, 민혁아. 그만 마셔. 몸도 안 좋은 게.”

“그만 마시긴 뭘 그만 마셔. 내가 오늘, 박경 이 새끼랑 뽕을 뽑고 갈 거야, 뽕을. 알아들어, 새끼야?”

“내가 빙신이냐, 말길도 못 알아듣게? 이민혁 이 새끼 이거, 4년 안 봤다구 나 서울대 나온 것도 잊어버렸네. 대본은 그렇게 줄줄 외우고 다니더니.”

“서울대 나온 새끼가 월급쟁이 밖에 더 됐냐? 그리고, 어, 연극이랑 너랑 비교가 되?”

“…….”

“내가 너, 그 잘난 대학 나온 건 잊어버려도, 내가 그 때 했던 연극 대사들 아직도 달달달 외우거든?”

“…….”

이 새끼, 하며 치고 들어와야 정상인 경이 아무 말 없자 민혁도 말을 멈추고 잠시간의 침묵에 떨궜던 고개를 든다. 민혁을 향해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느리게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너희 둘 다 내가 밉지? 미워서 죽여 버리고 싶지? 무슨 낯짝으로 다시 돌아왔나 싶고……. 왜 죽지도 않고 살아있나……. 살았으면, 떠났으면 돌아오지나 말지……. 나도, 나도 내가 미워. 그런데, 어떡해…….”

잠이 오는지 목소리가 더 늘어지고 느려진다. 경은 계속해서 소주를 따라 마시기 바쁘고 유권은 이어지는 민혁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쓰러지듯 엎어지는 그에 놀란다. 하지만 그 이상 무엇도 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떡해……. 나 자신보다, 연극이 좋고……. 연극보다, 김유권이…….’






15


공연 기간이 다가왔다. 연습에 연습, 연습 또 연습이어서 민혁을 볼 시간이 자주 없었다. 밤늦게 돌아와 지쳐서 자기 일쑤였고 민혁도 그런 유권을 더 수고롭게 하지 않았다.

밤늦게 들어온 유권을 기다리고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친 민혁이 얹혀살고 있는 사촌 누나의 오피스텔로 돌아가려 몸을 일으킨다. 여기. 배웅을 해주러 현관까지 따라 나온 유권이 공연 표 한 장을 내민다.

“경이한테도 표 한 장 줬어. 말해뒀으니까 경이랑 같이 보러 와.”

“…….”

“너에게 처음으로 보여주는 내 무대라 다른 때보다 더 열심히 준비하고 있으니까,”

“유권아. 나,”

“…….”

“널, 볼, 자신이 없어.”

“…….”

민혁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한다.

“미안해서, 나 때문에 너,”

“고마워.”

떨리는 입술을 한 채 한 글자씩 이어가던 말을 끊으며 그의 손목을 잡아끄는 손.

“네가 사랑했던 무대를 알게 해줘서 고마워.”

“김유권…….”

유권이 떨리는 손을 더 잡아끈다. 그리고 제 앞에 선 연인에게 다정히 입 맞춘다. 어떻게 말해야 내 진심이 전해질까. 나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고. 비록 4년 전처럼 팔을 크게 휘두르며 물살을 가를 수는 없어도 그 대신 네가 사랑했던 것들을 알게 되어서 기쁘다고. 그리고 그걸 드디어 네게 보여줄 수 있게 되어서 행복하다고. 어떻게 말해야 네가 알아줄까. 어떻게 표현해야 네가 그 미안하단 마음을 깨끗이 지울 수 있을까.

주인이 없는 집 안에서 민혁은 책꽂이에 가득한 대본들을 하나하나 꺼내본다. 빨간색 혹은 파란색으로 어지럽게 쓰여 진 못생긴 글씨들이 보인다. 단정한 검은색 글씨들과 뒤엉킨 그것들이 노력의 결과물임을 증명해주는 것 같다. 너무 많이 읽어 손때가 타고 모서리가 다 낡아 헤진 종이 더미들. 그 가운데 하나가 민혁의 손에서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덩달아 바닥에 앉은 민혁이 그걸 펼쳐본다.

뮤지컬 대본이었다. 표지에는 대학 서편제, 라고 쓰여 있었다.

“뮤지컬 까지 했었어? 김유권 대단하네.”

대견하다고 해야 할까. 사실 네가 수영을 그만 둔다고 해서 연극을 할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너로 인해 떠나며 그만 두게 된, 버리게 된 내 일이라 그걸 네가 할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대본을 한 장 한 장 넘겨보던 민혁의 손이 약간 떨리며 멈춘다.

“내 가슴이 그댈 보낸 적 없어, 내 기억이 그댈 놔준 적 없어. 내 삶이 다 끝나 사라지고 없대도 나와 함께 묻혀 잠들 사람, 내가 다시 만나게 될 사람.”

따라 읽은 대사 끝에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다. 글자는 작은데 너무 많이 덧쓴 탓에 다른 글자들에 비해 눈에 확 띄는 세 글자, 이. 민. 혁. 그 못생긴 세 글자를 쓸어보는 손끝이 진동한다.

혹시나 해서 주인공 동호의 대사를 더 따라가 보니 대사 옆에 조그맣게 쓰여 있는 낙서를 몇 개 더 발견했다.

「동호 : 바람이 또 그대 소리가 된다. 구름이 또 그대 얼굴 된다. 달빛마저 잠든 어둠에도 나의 눈은 그댈 볼 수 있네.」

보고 싶다.

「동호 : 내 사랑은 미처 이루지 못해 내 미련이 그댈 놔주지 않아. 이 노래 다 끝나 그댈 잡지 못해도 너를 찾는 발길 멎지 않아.」

없어.

몇 장을 더 넘겨도 더 이상은 낙서를 발견 할 수 없어 그만 두려는데 그 때 마침 대사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민혁은 대사와 그 옆에 삐뚤게 쓰여 진 글씨에 대본을 끌어안고 엉엉 운다.

「동호 : 꽃이 피고 지고 다시 피듯이 세월 가도 지지 않는 그대. 밤 새워 나 흘린 눈물 속에 얼룩처럼 박혀버린 사람.」

다음 꽃이 피면 네가 올까.

평소보다 복통이 심하게 밀려온다.






16


“유권아, 우리 거기 다시 가보자.”

공연 없는 날 이틀 정도 잡아서 여행 가자. 일주일 중 이틀 이상은 무대에 서야하는 데도, 공연이 없는 날에는 연습에 매달려야 하는 데도 군말 없이 그래, 하고 답해준 유권. 민혁은 기분 좋게 이야기를 꺼냈음에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혼자 교통편을 알아보고 짐을 싸는 동안 생각했다.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남아있는지. 몸이 어디까지 버텨줄지.

복통이 전보다 심해졌다. 전엔 배탈 수준에도 못 미칠 정도의 통증이었는데 이제 그 수준을 뛰어넘는다. 그래서 가끔 혼자 배를 부여잡고 끙끙 앓기도 한다. 저번 밤에 경과 무리해서 술을 마신 탓도 있고, 치료는커녕 약의 도움조차 받지 않고 있는 탓도 있다. 하지만 무엇에도 매달릴 수 없다. 말기에도 치료할 수 있는 게 간암이라지만 어차피 수술에의 희망은 많지 않고 이러다 끝날 자신이란 걸 알아서.

세상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 흉내를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지금 너무 행복해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민혁은 새벽같이 출발한 버스 안에서 피곤한 듯 잠이 든 유권의 고개를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정말,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무대 위에서 움직이고 대사를 말하는 모습을 보면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그런데, 생각보다 담담했다. 아니, 오히려 행복하기까지 했다. 아프기만 할 줄 알았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은 그래, 그저 사랑스러웠다. 끔찍해서 증오하고 싶을 법도 한 그 무대를 이제 온전히 자신의 것인 냥 즐기고, 그 위에서는 다른 어떤 때보다 열심이고 열정적인 모습이, 가슴 아픈데도 행복했다.

‘무대 위에서 그게 가능하다면 유권아, 난 널 연기해 보고 싶어.’

이제 그러지 못하겠지만, 할 수 있다 해도 안 하겠지만, 민혁은 유권의 무대를 보며 추억을 되짚는다. 그 때의 우리는 꽤나 많이 어렸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 일과 너에게 사랑 받는 일을 즐거워했고, 너는 미련할 정도로 나를 많이 사랑했지.

‘이민혁!’

환영처럼 보이는 장면과 환청처럼 들리는 목소리에 민혁이 몸을 부르르 떨며 감았던 눈을 뜬다.

“너는, 왜 그렇게, 미련하게 나를 사랑해서…….”

핀 조명이 떨어졌고 심호흡을 하고 대사를 시작했다. 거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끝나면 바로 유권에게로 달려갈 생각에 조금 들뜬 마음으로 무대 위에 서있었다. 독대사가 거의 끝나갈 즈음 갑자기 유권의 외침이 무대 위를 덮쳤다. 그리고 유권의 몸도 무대 위로 달려들었다. 민혁의 몸 위로 유권의 몸이, 그리고 그 위로 크고 무거운 무대 장치가 떨어졌고 유권의 아픈 비명만이 들려왔다.






17


“…….”

“일일구 불러, 일일구!”

“장치부터 들어내요, 빨리!”

“관객들 전부 내보내.”

눈을 뜰 수가 없다. 숨도 쉴 수가 없다. 무슨 말을 하는 것도 당연히 할 수 없다. 입술이 부들부들 떨린다. 감은 눈도 떨린다. 지금 나를 끌어안고 쓰러진 사람이 네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민혁, 아, 괜찮아?”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랑법이다. 지키기 위해, 사랑한다고 알려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방법. 네가 예수니? 나는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거 싫단 말이야. 싫어, 싫어, 싫어.

“눈…… 떠봐. 응?”

파르르 떨리던 눈이 떠지고 그를 본다. 웃고 있는 얼굴이 눈 안으로 가득 들어찬다. 유권이 두 팔로 바닥을 지탱하고 민혁을 팔 안에 가둔 채 엎드려 있다.

“아, ……파?”

고개를 젓는다.

“거, 짓말, 하지 마.”

여전히 웃는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진다.

“아, 프, 잖아, 너, 지금…….”

다시 고개를 젓는 얼굴은 여전히 일그러진 채로 웃는다.

“왜, 그랬어, 등신아아…….”

결국 눈물 몇 방울이 얼굴 위로 후두둑 떨어진다.

“병신아, 누가 너더러, 나 대신 아파달래? 내가, 흐윽, 나 연기하는 거 봐달라고 했지, 무대 위로 올라오라고 했어? 흐으, 흐윽, 개새끼야. 너 돌았어? 김유권, 너 때문에 다 망쳤잖아.”

시발, 하고 욕을 꺼낸 입술이 와아아앙, 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걸 가만 지켜보고 있던 유권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지 아픈 줄도 모르고 저려오는 팔을 접어 민혁의 위로 몸을 겹친다.

“너, 만, 괜찮으면, 돼.”






18


목적지는 정동진. 딱히 뜨는 해를 보고 싶다는 소망은 없다. 그저 과거 어느 날, 유권과 함께 여행했던 곳을 다시 찾은 것일 뿐. 미리 예약해 둔 펜션에 도착해 짐을 내려놓은 유권이 기지개를 켠다.

“돈이 어디 있어서 이런 펜션을 예약했어.”

“누나가 해줬어. 재미있게 놀다 오라구.”

돌아가면 한 번 찾아 봬야겠다, 하고 웃는 얼굴을 보다 그 뒤로 보이는 창문 밖을 보고 점심시간이 한참 지났음을 눈치 챈다.

“밥, 먹을까.”

“밥?”

되묻는 유권에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린 민혁이 내려놓았던 짐에서 주섬주섬 라면을 찾아낸다.

밥 먹자. 홀로 김을 모락모락 올리는 라면과 편의점 김치와 찬 인스턴트 쌀밥. 민혁이 조촐한 밥상을 차리고 유권을 부른다. 짐 정리를 하고 있던 유권이 그 앞으로 다가온다.

“수저도 안 주고 먹으라고?”

“여기 있잖아.”

제 앞에 있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양 손에 각각 집어든 민혁이 라면을 숟가락에 올려 유권의 얼굴 앞에 들이민다. 눈을 잠간 올려 뜨며 민혁을 바라보는 유권에 먹으라는 듯 턱짓을 한다. 라면, 밥, 김치. 라면, 밥, 김치. 몇 번을 받아먹던 유권이 숟가락에 라면을 올려 담는 민혁의 손목을 잡아 멈추게 한다.

“넌 안 먹어?”

“난 너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른데?”

“그건 드라마에서나 그런 거 아니었어?”

“우리 지금 드라마 찍고 있잖아. 김유권 이민혁 주연의,”

행복한 신파 드라마. 씩 웃고 다시 손을 움직인 민혁이 라면이 올려 진 숟가락을 또 유권 앞에 내민다. 그걸 잠깐 바라보던 유권은 민혁의 손을 잡아 숟가락에 든 라면을 있던 자리에 내려놓고 젓가락을 뺏어든다. 이왕 드라마 찍는 거 제대로 찍어보자. 유권이 라면을 조금 들어 올려 민혁에게 한 입 먹이고 그 아랫부분을 자기 입에 담는다. 유권의 행동에 피식 웃은 민혁이 라면을 살짝 발아들이자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입술이 조금씩,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가까워지던 두 얼굴이 결국 코가 닿을 위치까지 달했다. 그리고 민혁이 면발을 끊고 먼저 떨어진 후 ‘컷’ 그런다.

“엔지 아니에요?”

“왜요? 딱 좋았는데.”

“드라마가 너무 재미없잖아요.”

“그럼 라면 키스하고 그대로 침대로 가요?”

민혁이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하자 유권이 그의 손목을 덥석 잡는다. 가자, 가자. 어린아이가 재촉하듯 팔을 끌어당기는 그에 민혁이 웃으며 일어선다. 잠깐 산책하고 오자, 권아.

바닷가를 걷는 발 네 개가 모래 위에서 느리게 움직인다. 잠시 멈추기도 하고, 멈춰서 서로를 마주보기도 하고. 잔잔한 바다 위로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둥둥 떠가다 지는 해 아래에 모여 덩어리를 만든다. 시작을 나누고 과정을 공유하고 그 가운데 어둠을 돌아보고 다시 빛을 찾고. 그렇게 추억 덩어리를.

“기억나? 우리 여기서 우연히 만나서 여행했던 거.”

“응. 1학년 때 우리 과 과제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 혼자 여행하고 오는 거였잖아.”

“그거 우연 아니었어.”

“그럼?”

“경이가 너 혼자 여행 다녀올 거라고 알려줬었어.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김유권이 갈 곳이 여기 밖에 없더라고.”

“맞아……. 니가 정동진 오고 싶다고 했었잖아.”






19


모래시계 공원. 당일치기 여행이라 시간이 많지 않았던 두 사람의 마지막 여행 코스. 역에서 그나마 가장 가까운 곳이라 다른 곳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길에 공원에 들른다.

“저 모래시계가 세계에서 제일 크대.”

“저 모래 다 떨어지려면 일 년 정도 걸리려나?”

“응, 딱 일 년.”

“이민혁 사랑 다 떨어지려면?”

“내 사랑?”

대형 모래시계 앞에 선 두 사람은 연인처럼 손을 잡지도 그렇다고 가까이 서지도 않은 채다. 그저 나란히 서 모래시계만 바라보며 서로의 목소리를 느낄 뿐.

“글쎄, 저 모래시계로 한…… 백 개 정도 있어야 되려나?”

“꼴랑?”

“야, 백 개면 백 년이야, 백 년. 내가 늙어서 꼬부랑 할아버지 되도 너 좋아하겠다는데 그게 꼴랑이야? 꼴랑?”

발끈해서 쏘아 붙이는 민혁에 유권이 해사하게 웃는다. 그 웃는 얼굴에 또 금세 기분이 좋아진 민혁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따라 웃는다.

사진 찍자, 여기서 마지막으로. 민혁이 역에 도착해서 구입했던 일회용 카메라를 꺼내 든다.

“우리 여기서 같이 찍은 사진 하나도 없는 거 알아?”

“다른 사람한테 찍어 달라고 하자.”

민혁이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 마침 대형 모래시계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자리를 벗어나려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카메라를 넘긴다.

모래시계 앞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의 어색함에도 사진 촬영을 부탁 받은 이는 좀 더 붙어 보세요, 따위의 말도 없이 하나, 두울, 세엣. 감사합니다, 인사하며 민혁이 카메라를 받아 온다.

“배고프다.”

“컵라면 먹을까?”

여기까지 와서 무슨 컵라면이야, 할 줄 알았던 민혁은 순순히 나무젓가락을 톡 떼어내 손바닥 안에 맞대고 도르르 굴리는 중이다. 편의점의 일자 식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창밖을 간간히 쳐다보며 라면을 먹던 유권이 대뜸 비 온다, 하며 놀란다.

“어, 정말?”

“다 먹고 역까지 뛰어가자.”

“시합할까?”

“뭐 걸고?”

음, 입술을 앙 다물고 눈을 굴리며 잠시 생각하던 민혁이 레포트 대신 써주기? 한다.

“뽀뽀해주기 정도는 돼야지.”

“하여튼, 김유권. 생각을 해도 꼭.”

“얼른 먹어. 나 거의 다 먹었다. 내가 이기면 뽀뽀 해줘야 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면 컵에 머리를 박다시피 하고 면발을 흡입하는 유권을 보며 민혁이 황당해 웃는다.

유권아, 돌아가면 우리-. 종알종알 이런 저런 이야기를 꺼내다 피곤했는지 들뜬 목소리가 사그라지더니 무겁지 않은 머리가 유권의 어깨에 톡 박듯이 떨어진다. 고개를 살짝 틀어 민혁의 얼굴을 슬쩍 바라본 유권도 잠든 그의 머리 위로 제 머리를 살짝 기댄다. 돌아가는 버스 안은 그랬다.





20


어쩌면 그는 내 곁에서 죽기 위해 내게 다시 돌아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그가 술을 마셔도 말리지 않았고 복통에 시달려도 그저 안아주기만 했다. 하지만 이젠 그게 아니어야 했다.

사랑해, 그 쉬운 세 글자도 잘 말해주지 못했지만 꼭 목소리로 표현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해서든 말로하지 않고 사랑을 표현하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4년간의 공백 동안 우리에게 생긴 변화를 찾고 모든 것에 다 맞춰가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나는 우리 사랑의 결말이 어디쯤 있는지 손꼽아 보기도 했다.

병원에 다녀온 어느 날은 대책 없이 술을 들이키기도 했다. 이유는 묻지 않았지만 술을 더 이상 마시게 하고 싶지 않아 말렸다. 어떻게 말해도 곧 죽을 텐데, 하며 술 마시기를 멈추지 못하던 그가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진 이유는,

‘하루라도 더 내 곁에 있으란 말이야.’

애가 탄 내 진심 때문이었다.

네가 수술 안 하려고 하는 것도, 죽는 날만 기다리는 것도 알아. 그래도 최대한 오래 버텨 줘. 기왕 내 곁에 온 거, 하루만 더. 내일 가야하면 모레 가게 되도록 내 곁에서 하루라도 더.






21


이틀을 냅다 쉬고 다시 연습을 하려니 평소보다 몸이 더 빨리 지치는 느낌이다. 무대 위에선 그저 정해진 대사와 동작만을 보여주는 게 다지만 무대 뒤에선 바쁘게 뛰어다니는 게 연극배우들이다. 연습이라고 소홀히 할 수 없어 조금 무리했다고 일찌감치 피곤이 몰려오는 것 같다.

이 장면만 하면 끝이다. 어느 정도 홀가분한 마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퇴근길에 인화를 맡긴 사진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동선을 파악하는데 쿠당탕, 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놀란 눈으로 무대 아래 서있는 연출자를 바라보는 유권 앞으로 조명 기구가 무겁게 떨어진다. 풀린 다리가 힘없이 주저앉는다.

사진을 찾을 생각은커녕 비를 피해야 한단 정신도 없어서 비를 쫄딱 맞으며 아파트 단지로 들어선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걸음이 비틀비틀. 힘없이 푹 수그러진 고개, 눈물인 냥 얼굴을 타고 떨어지는 빗물들. 김유권! 하고 부르는 소리에 힘겹게 들리는 아픈 얼굴.

“미쳤어? 감기 걸려, 너.”

개도 안 걸리는 여름 감기. 아침에 우산을 들고 나가지 않은 유권이 생각 나 혹시나 해서 나와 본 민혁이 유권을 발견하고 잰걸음으로 달려와 우산 안으로 유권을 끌어당긴다. 아무 말도 없이 힘없이 끌려오는 그에 민혁이 걱정스레 무슨 일 있었냐고 묻는다.

“권아…….”

대답을 하지 못하고 민혁을 바라보는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다.

“울어도 돼.”

결국 유권이 흐으윽, 하고 서러운 울음을 터뜨린다. 민혁이 우산을 들지 않은 팔로 토닥이며 안아주자 유권이 그의 등을 와락 껴안는다. 민혁이 놀라 우산을 떨어트린다.

“다시, 오지 말지.”

“…….”

“흐윽, 윽, 또, 갈 거면, 돌아오지 말지.”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히고 꺼억, 꺼억 숨이 넘어갈 듯 우는 유권의 울음소리가 빗소리와 함께 귀를 때린다.

“흐으으…….”

“미안해.”

“흐어엉, 엉엉.”

“미안해.”

우리를 살 수 있게 했던 모든 게 다 망가진 것처럼 우리도 무너져 내렸다.






22


마지막 공연을 마쳤다. 2차까지는 가자며 조르는 동료들에게 미안하다며 웃어 보이고 찾은 곳은 다름 아닌 경의 집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했어?”

“하고 많은 조연 중 하난데 뭐.”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고. 유권이 주연을 맡은 공연을 보러왔던 연예 기획사 사장이 유권에게 영화배우를 해보지 않겠냐고 제안해왔다. 만족스러운 계약 조건은 물론이고 바로 데뷔도 가능 하다고. 첫 작은 곧 촬영에 들어가는 한 영화의 조연으로.

“그거, 연극 아니야, 김유권.”

“내가 그랬었잖아, 민혁이 돌아왔을 때. 이제 그만 둘 것 같다고. 그만 두려고. 무대가 먼저 날 찾지 않는 이상 내가 먼저 찾지는 않으려고.”

“다시, 사라졌잖아.”

올라오던 취기가 가시는 것 같다. 입은 슬쩍 웃지만 눈엔 약간의 원망을 담은 채 경을 바라보는 유권이 답답한 듯 숨을 크게 몰아쉬다가 거실 바닥에 벌러덩 누워 버린다.

“안 찾아?”

“응.”

“…….”

“걔, 그냥 죽기 전에 나 잠깐 보러 온 거였어. 저승사자처럼 나랑 같이 죽자고, 그런 것도 아니었고. 자기 죽을 때 옆에서 울어 달라고, 그런 것도 아니었어. 그냥…… 죽기 전에 나 잘 사는지 보러 온 거야. 그리고 자긴 죽을 거니까 이제 그만 기다리라고.”

“기다렸었어?”

“그 때는. ……지금은 아니야.”

민혁이 찾아오지 않은 지 일주일이 되어 간다. 빗속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울었던 그 날 이후로 어떠한 연락도 없다. 하지만 4년 전처럼 그를 찾지는 않는다.

“죽었다고, 장례식 한다고 연락 오면 갈 거야?”

“가서, 누구보다 슬프게 울어줘야겠지. 그래도 혹시 살 수 있는 기회가, 큰 돈이 생긴다면 꼭 살았으면 좋겠다. 간암은 말기에도 수술 가능하다잖아. 나한테 다시 안 돌아와도 좋으니까 살 수 있으면.”






23


“다음 촬영 어디서 하는 데요?”

“정동진.”

멀리도 간다며 투정하는 매니저와 다르게 유권은 모든 사고회로가 멈춘 듯 아무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한다.

데뷔 작이 무려 700만 관객을 기록하며 흥행했다. 꽤 비중 있는 조연 역할의 연기를 해낸 유권도 순식간에 일약 스타덤에 올라 바로 다음 작품 섭외가 여럿 들어왔고, 주연을 맡게 된 다음 영화의 촬영지 중 한 곳이 정동진이 되었다는 것이다.

‘거기라도 다시 가봐라. 정동진.’

‘나 이제 민혁이 안 찾는다고.’

‘그래도.’

‘정말…… 거기 있으면 어떻게 해.’

곧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크게 외치는 촬영 스태프의 목소리에 놀라 잠에서 깬다. 촬영 전까지 시간이 좀 남아 쉬다가 깜빡 잠이 든 유권이다. 경과 나눴던 대화가 꿈에 나왔다. 어쩌면 이번엔 정말 정동진에 있을 지도 모른다고. 그냥 그렇게 믿고 한 번 다녀오라고. 그런데 차마 그러지 못한 이유는 정말로 민혁이 그 곳에 있을까봐. 기다렸다는 듯이 그곳에 있을까봐.

형, 저 잠깐 산책 좀 하고 들어갈게요. 촬영이 새벽까지 계속 되었고 결국 해가 뜨고 말아 중단 되었다. 모두 대충 철수하며 좀 쉬고 다음 씬 촬영 때 봅시다, 하며 흩어졌다. 감기기 일보 직전의 눈을 한 매니저가 건성건성 손을 휘둘러 보이고 유권은 조금은 무거운 걸음을 옮긴다.

‘저 모래 다 떨어지려면 일 년 정도 걸리려나?’

‘응, 딱 일 년.’

‘이민혁 사랑 다 떨어지려면?’

민혁과 함께 이곳에 왔던 그 때가 엊그제 같은 데 벌써 일 년여의 시간이 지났다. 지금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유권에게 생긴 것들만큼 그에게도 많은 변화가 생겼을 것이다. 정말 복권에라도 당첨 되어 수술을 했다던가, 아니면 병세가 약화 되어 아직 살아갈 날이 좀 더 남았다던가.

공원 벤치에 앉아 하릴없이 떨어지는 모래시계를 바라만 보고 있다. 밤샘 촬영이 깊었어야 했으면 촬영지를 영 잘못 잡았다. 벌써 해가 저렇게나 많이 나왔는걸.

‘권아.’ ‘권아.’ ‘김유권.’ ‘미안해.’

잠을 좀 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대 위에서 그게 가능하다면 유권아, 난 널 연기해 보고 싶어.’

오래된 옛 추억을 꺼내보는 일이 이제는 지겨워 질 지경이다.

그 때 내가 먼저 라면을 먹어치우고 여유롭게 껌을 하나 사 씹으며 역까지 달려가 널 기다리고 있었어. 손등으로 얼굴만 가린 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달려온 너를 안고 내가 키스했어. 누가 본다며 부끄러워하는 네게 아무도 없어, 괜찮아, 하며 내가 키스했어. 너를 끌어안고 키스했어. 비 냄새에 섞인 너를 맡으며 키스했어. 장마철에 돌아온 너와 함께 한 시간의 대부분에 비가 내렸다는 걸 모른 채 키스했어.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을 모르고 키스했어.

민혁이 떠난 뒤로 수십 번은 더 생각했었다. 행여나, 행여나 다시 돌아온다면 1년간 연예인 하며 번 돈, 있는 거 없는 거 탈탈 털어서 살리고 말겠다고. 살리겠다고. 내 곁에서가 아니라도 좋으니까 살리겠다고.

왜 벌써 여름인지 모르겠다. 하필 왜 그와 함께 왔던 그 시기와 비슷한 때인지도 모르겠고. 비나 왔으면 좋겠다. 촬영 지연 되게.

들어가 눈 좀 붙여야겠단 생각으로 벤치에서 일어나 공원을 가로지른다.

‘다 먹고 역까지 뛰어가자.’

‘시합할까?’

‘뭐 걸고?’

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때처럼. 유권이 제자리에 서 몇 번 콩콩 뛴다. 그리고 금방이라도 달려갈 태세로 몸을 앞으로 숙이는데 누군가 뒤에서 그런 유권의 오른손을 잡는다.

‘내가 이기면 뽀뽀 해줘야 돼.’

놀라지 않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익숙한 손에 뒤를 돌아보자,

“니가, 이겼어.”

“…….”

“유권아.”

“……이…….”

“맞아, 나 여기 있었어.”

“……민…….”

“니가 이겼어. 비록 내가 먼저 널 찾았지만.”

“……혁…….”

일찌감치 뜬 새벽녘의 푸르스름하지 못한 햇빛에 민혁의 미소가 환하게 빛난다. 유권은 잠시 넋을 놓고 그 얼굴을 바라보다 뒷걸음질 친다. 귀신이라도 본 마냥 어깨를 떨며. 하지만 그런 유권에도 불구하고 민혁은 말갛게 웃으며 더 가까이 다가가 유권의 품을 껴안는다.

우리에게 아직 많은 여름이 남았다.

 

 

Posted by Jo_s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