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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2. 30. 18:01 from 오래된 글들/Text

미르X성종





꿈속에서 나는 색색의 꽃이 만발한 들판을 걷고 있었다. 태평양이라도 되는 양 들판은 끝이 없이 이어져 있었고, 내가 걷는 방향의 먼발치에는 그가 서 있었다.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그가 내 이름을 부르며 양 팔을 벌리고 있었다. 내 걸음이 빨라졌고 금세 그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품에 안겼을 때 나는 그를 ‘미르 형’이라고 불렀다.

내가 남자를 좋아한다거나 남자에게 이성적으로 호감을 가질 거란 생각은 열아홉 해를 살며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연습생 시절부터 연습과 주위 사람에게 치여 누굴 좋아한다는 자체를 생각하는 것부터가 어려웠다. 예쁘고 착한 여자 친구가 있다면 좋기야하겠지만 일단은 내 일이 중요하니까. 늘 그런 생각이었다. 고로 난 게이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게이일까? 내게 외투를 벗어주고, 밥을 떠먹여 주고, 물을 건네주던 다정한 손. 나를 격려해주고, 추운 날씨에도 내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주던 마음. 단지 나를 그저 친해지고픈 동생으로만 생각해서 일까.


“성종이 오늘 스케줄 있어?”

“그거, 원더 보이즈 연습.”

“그래? 밖에 눈 왔던데, 형이 차까지 데려다줄까?”

“매니저 형이랑 같이 가면 돼.”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보고 있던 TV로 시선을 옮기는 우현이 형. 문득 미르 형과 친하다던 우현이 형의 말이 생각나 형, 하고 그를 불렀다.


“그 형, 어때? 미르 형.”

“미르?”


신발을 신으며 대충 응, 대답하고 고갤 들자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


“착해. 성격도 좋고, 주위 사람들한테 잘하고. 집에서도 막내고, 팀에서도 막내다 보니까 귀여운 면도 있고.”


끝나고 전화 해. 문을 쾅 닫자 바로 차가 출발한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내내 나는, 동생이라 그렇게 챙겨주는 거구나. 동생이라, 동생이라. 따위의 생각만 했다. 그럼 나도 나답게 굴면 되겠지. 눈이 다 녹아 있어서 편하게 걸음을 옮기려는데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광희 형과 그, 미르 형이 이쪽으로 나란히 걸어오고 있다. 내 이름을 부른 사람은 광희 형.


“안녕하세요.”


허리를 굽히며 인사한 내게 광희 형이 손을 마구 흔든다. 그는 그저 살짝 웃기만. 춥다며 먼저 들어간 광희 형의 뒤로 그와 내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어젯밤 내가 차에 타고 나서야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던 그가 떠올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색함을 무릅쓰고 고마웠다고 말을 하려하는데 그의 팔이 내 어깨를 감싼다.


“춥다, 그치?”


당황한 내 고개가 삐걱삐걱 소리가 날 것처럼 끄덕였다. 어깨 위로 둘러진 그의 팔을 느끼며 지하로 내려가는데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우리의 종종 걸음이 맞추기라도 한 듯 닮아있어서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연인 같은 우리의 네 발만 쳐다봤다.

실내로 들어서자 동희 형과 현무 형이 어서 오라며 우릴 반겼다.


“야, 너희 둘이 그러고 있으니까 잘 어울린다.”


팔짱을 낀 채 우릴 쳐다보는 현무 형의 말에 어제 그랬던 것처럼 동희 형이 장난에 가세한다.


“어제부터 이상한 기류가 흐른다 했더니, 둘이 사귀기로 했냐?”


내가 아니라며 양 손바닥을 내저어보이는데 내 어깨를 감싸고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간다.


“에이, 오늘 고백하려고 했는데 형들 때문에 망쳤잖아요.”


그가 팔에 힘을 준 탓에 내 몸이 그에게로 더 가깝게 딸려갔다. 공간 안의 모두가 그 말에 웃었지만 나만 그러지 못한 채 고갤 돌려 코앞에 있는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샤워 코롱 향인가. 향수 같지는 않은 옅지만 기분 좋은 향이 그에게서 풍겼다.


“성종아. 미르 고백 받아줄 거지?”

“오늘 점심 뭐 먹을래? 미르가 성종이 먹여주기 쉬운 거 시키자.”


형들의 장난에 그가 즐거운 듯 웃으며 나를 돌아본다. 마주치는 시선에 심장이 쿵쾅쿵쾅 빠르게도 뛴다. 부디 이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내 심장박동을 느끼지 못하기만을 바랄 뿐, 나는 어떠한 말도 행동도 할 수가 없다. 아마도 내 마음은 그의 행동들이 장난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나보다.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내 마음이 나는, 두렵다.

성종이가 이 춤 출줄 안다고 했지, 하고 묻는 동희 형에 나는 집에서 TV 보며 따라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컴퓨터 연결이 안 되네. 프로듀서 형 올 때까지는 우선 성종이 보면서 따라 해보자.”


Be my baby. 춤을 미리 카피해 놓은 건 사실이다. 몇 번 보면 금세 따라 추기도 했고, 걸 그룹 춤을 따라 추는 게 취미이기도 했다. 물론 Be my baby 역시 그 중 하나였지만 이렇게 선보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평소 같았다면 자신 있게 나서서 춤을 췄을 텐데 왠지 모를 위축감에 내 걸음이 주춤댄다. 정면에, 벽을 가득 메운 거울 속에 어색한 내가 있다. 그리고 한 발짝 정도 뒤에 나란히 선 네 사람. 그 가운데 내가 눈을 맞추지 못하는 한 사람. 그 사람 때문에.

나를 보며 금세 춤을 다라 추는 멤버는 동희 형과 광희 형. 예상했던 대로 현무 형은 한 동작에서 다른 동작으로 이어가는 것마저 어려워했다. 그리고 내가 금세 춤을 따라 추길 바랐던 한 사람, 미르 형. 익숙하지 못한 지 안무를 계속 잊어버리는 그와 현무 형 그리고 나를 남겨두고 동희 형과 광희 형은 점심을 주문하러 연습실에서 나갔다. 머지않아 조금 쉬겠다며 현무 형이 따라 나가고 공교롭게도 그와 나, 둘만 남았다. 닫힌 문을 애처롭게 바라보다 한 번 더 해보자는 그의 말에 오디오 재생 버튼을 눌렀다.

곡이 한 번 다 끝나갈 때까지 나는 내 춤에만 열심이었지 그를 한 번도 쳐다보질 못했다. 행여나 눈이 마주쳐 버릴까 무서워서 차마 그에게로 시선을 둘 수가 없었다. 마무리는 내가 중앙에 앉고 내 옆으로 현무 형과 그가 각각 앉아 각자 포즈를 취하기로 정했었다. 곡이 끝나갈 때 나는 조금 떨리는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고, 곧 바로 그가 내 오른쪽에 앉았다. 그제 서야 거울 속의 그를 볼 수 있었다. 거울을 통해 교차하는 우리의 시선. 나는 눈을 두어 번 깜빡였지만 여전히 그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나와 눈을 맞추고 있었지만 평소처럼 미소를 짓지도 웃는 얼굴이지도 않았다. 우리의 숨소리만 간간히 들려오는 정적 속에서 나는 이번엔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가슴 졸였다.

그가 잠시 입을 움직이곤 일어나 연습실에서 나갔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예쁘다.’


귓가에서 그가 계속 말해주는 듯 쉬지 않고 반복 되어 머릿속을 뒹구는 세 글자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 말이 날 보고 한 말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도 연습실에서 나가려 떨리는 다리를 세웠다. 벌서 점심시간이다.


“제육 덮밥 시켰어. 괜찮지?”

“이 근처엔 온통 중국집뿐이더라. 제육 덮밥도 겨우겨우 시킨 거야.”


벌써 배달 왔는데 어쩌겠냐며 웃은 그가 덮밥이 든 그릇을 들고 어제 앉았던 그 자리에 앉는다. 나는 혹시나 또 그의 옆에 앉게 될까봐 얼른 내가 먼저 다른 자리에 앉아야겠다고 맘먹고 그릇을 집어 들었다.


“이제 저 자린 미르랑 성종이 지정석이네.”


동희 형이 맞은 편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나는 동희 형이 말한 그 자리의 반대편으로 움직이려던 다리를 우뚝 멈춰 세웠다. 광희 형의 높은 웃음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함께 깔깔 웃던 현무 형이 내 등을 밀며 오늘은 서로 떠먹여 줄 거냐고 묻는다. 현무 형의 손에 떠밀려온 내 다리가 그가 앉은 소파 근처에서 갈 길을 잃고 헤맨다. 좋아하잖아. 마음이 그리 말해도 머리는 그렇게 뻔뻔하진 못하겠단다.


“형들은 왜 애를 놀려요? 당황했잖아, 성종이.”


내가 잠깐 머뭇거리는 동안 그가 형들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니가 성종이만 좋아라하니까 그렇지, 임마.”

“형들한테 성종이 챙기는 거에 반만 해봐라.”


각자 자리에 앉으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는 형들. 그리고 그가 나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늘 막내여서 동생 생기니까 좋아서 그래요. 이리와 앉아, 성종아.”


내게 작게 손짓하며 말하는 그가, 섭섭하다가도 너무 다정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

점심시간 동안에 나는 고개도 들지 않고 꾸역꾸역 밥만 퍼먹었다. 광희 형이 성종아, 아침 안 먹었어? 하고 묻기에 고개만 세차게 끄덕여 보이고 밥을 흡입하다 시피 먹었다. 내 옆얼굴로 떨어지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지만 차마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제 연습 하자. 현무 형이 정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동희 형이 먹었으니까 소화도 시킬 겸 게임을 하자고 제안했다. 광희 형도 덩달아, 먹고 바로 움직이면 배만 아프다며 칭얼댔다. 벌칙은 편의점에 가서 간식거리를 사오는 거였다. 별 거 아니네, 하고 시작하려했지만 편의점이 걸어서 20분 거리라는 말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게임은 지는 사람이 하고 싶은 게임으로 이어가는 방식이었고 흔하디흔한 게임부터 시작해, 나는 이름도 모르는 오래된 현무 형의 게임까지 다양했다. 그렇게 해서 가장 많이 진 사람이 다녀오는 거였다.


“내가 네 번, 현무 형이 두 번. 광희도 두 번, 미르는 없고.”

“성종이가…… 여섯 번 맞지?”


한 게임이 끝날 때마다 휴대폰에 기록한 걸 보며 동희 형이 말하자 옆에 앉아있던 광희 형이 나를 보며 묻는다.


“알겠어요, 사올게요.”


내가 외투를 챙기며 일어나자 현무 형이 지갑을 꺼낸다. 추워봐야 얼마나 춥겠어. 다녀오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계단을 올랐다. 빨리 갔다 와야겠다는 마음으로 고갤 드는데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 쌓였네.”


저쪽은 그저께 온 눈 다 녹지도 않았던데. 한숨을 푹 쉬며 뒤돌아 다시 연습실로 내려갔다. 아무나 같이 가달라고 애원이라도 해야겠다.


“……왜?”


문을 밀고 안을 들여다보니 다들 먼저 연습하러 들어갔는지 미르 형이 혼자 앉아있다. 다시 돌아온 날 보고 왜, 하고 묻는데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같이 가달라고 하면 날 어떻게 생각할까.


“그게…… 밖에 눈이 내려서…….”

“눈? 많이 내려?”


소파에 기댔던 상체를 일으키며 나에게 집중하는 그. 추워서 떨리는 건지 이상하게 평소에 잘 하던 말도 쉽게 나오질 않는다.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여 주곤 다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찾아 헤맸다.


“아까부터 계속 내렸는지 눈이 쌓여있는데,”

“그래?”

“제가 눈길을, ……혼자 못 걸어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계속 나를 바라보던 그가 동그란 눈을 곱게 접어 웃으며 외투를 손에 들고 소파에서 일어난다. 같이 가주실 거예요? 묻지도 못하고 멍하게 그가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것만 멍하니 쳐다봤다.


“눈길 무서워하는 구나. ……귀엽다.”


그가 나를 지나쳐 먼저 계단을 오르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내 정신이 제대로 잡혀있는지도 의문인 상태로 그의 발만 쳐다보며 따라 올라갔다. 귀엽다, 귀엽다, 귀엽다? 귀엽대. 눈길을 무서워하는 내가, 그는 귀엽대.

외투에 달린 모자를 쓴 그가 먼저 건물 밖으로 나섰다. 나는 한 발도 내딛지 못하고 세 발짝 정도 앞서간 그의 뒤통수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내가 움직이지 않고 있는 걸 눈치 챘는지 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나는 그저 그의 얼굴을 보며 울상을 지었고, 그가 눈처럼 웃으며 내게 다시 돌아왔다.


“죄송해요.”

“형이 미안하지. 눈길 혼자 못 걷는 댔는데 먼저 가버리고.”


그렇게 말하는 그의 소매 깃을 손가락으로 살짝 잡았다. 잠시 그걸 내려다보던 그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놀란 내가 그의 얼굴을 쳐다보자 그는 그저 웃으며 내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긴다.


“성종이, 손 차다.”

“……형도 차가워요.”

“차가운 손끼리 계속 잡고 있으면 따뜻해지려나.”


나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하는 그의 미소가 따뜻하고 다정해서 손은 물론이고 온몸이 다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은 폴짝폴짝 뛸 듯 즐거운데, 그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내 어깨 뒤쪽으로 두 손을 뻗는다. 눈이 떨어지고 있던 내 머리 위로 모자를 씌워준 그의 손이 다시 내 손을 꼭 잡는다. 그렇구나.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걸 깨닫는 건 이렇게 행복한 일이구나. 어렸을 때 사고로 무서워하게 된 눈이 지금은 너무 고맙고 예쁘게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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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o_s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