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표지는 세인님께서 수고해 주셨어요. 무한한 감사를 전합니다.

 

 

 

 

 

울타리

 

 

 

가진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던 어린 우리. 말과 행동으로 모든 걸 드러내야만 하는 병에 걸렸던, 감추거나 간직하는 걸 몰랐던 치기어린 우리. 그 시절의 나는 나를 충분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서로의 가슴 속에 누군가 한 사람쯤은 지독한 암 덩어리처럼 키우고 있었던 시절. 김명수에게선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사랑이란 걸 배웠고, 남우현에게선 서로의 불행을 온전히 이해해 주는 것만으로도 사랑이라고 배웠다.

 

 

 

울타리 下 - 11

 

 

 

‘그런데 정말 또 어딘가로 갈 거야, 성종아?’

‘왜, 왜 또 가려고 하는 건데.’

‘무슨 일 있었어? 안 좋은 일이 생긴 거야? 그래서 또 떠나려고 하는 거야?’

‘어디로 가는지 나한테 알려주면 안 될까?’

‘어디든 상관없어. 너만 괜찮다고 하면 내가 너 보러 가면 되니까.’

‘너무 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아니다, 너무 멀면… 방학이 두 달이나 되니까, 두 달 동안 네 옆에 가 있지 뭐.’

 

 

혼잣말 같은 우현의 그런 말을 들으며 슬퍼했다. 이 이기적인 인생―우현의 인생에 큰 오점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책임질 수 없는 과거를 등지고 도망친, 그리하여 용서 받을 수도 없다고 여겼으나 용서를 받아버린―은 슬퍼할 자격이라도 있는 건가 싶으면서도 꽤나 많이 슬퍼했다. 우현의 물음이 대답을 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가 대답을 원했다고 해도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사실은 해줄 말이 없다는 게 더 옳았다. 정말 또 어딘가로 갈 건지, 왜 가려고 하는지, 어디로 가는지…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이라곤 없었으니까.

 

작년엔가, 서점에서 보았던 시가 있었다. 그 내용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 제목을 더듬으며 검색을 해보았다. 외자의 이름을 가진 남성 시인의 시 중 하나였다. 우연히 발견한 그 페이지에서, 연우의 기억에 사무쳐 시집을 살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사지 않았던 기억이 함께 있었다.

 

그런데 우리 너무 서둘렀던 걸까요? / 성벽에 부딪치는 사나운 종소리에 놀라 / 다시 만날 약속을 그만 빠뜨리고 말았어요 / 아마 나는 또 백 년쯤 기다려야 할지도 모르겠군요 / 백 년 만에 만난 여인이 봄을 가지고 사라져버렸으니, / 두 번째 나무 발등 아래 벌써 저렇게 깊은 겨울이 / 당도해 있는 걸 보니 말입니다

 

흔한 말이 있다. 사람 일이란 건 어찌 될지 모르는 거라 인연이면 다시 만날 거라고…. 삶을 살아가며 짧든 길든, 얕든 깊든 스쳐지나간 사람 중에, 그들 중에 백 년 만에 다시 만날 사람이 있을까. 그 시기가 되면 다시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그때 우리 너무 서둘렀었다며, 다시 만날 약속을 빠뜨렸었다며, 당신 봄을 도로 가져왔다며.

 

우현에게 그 시를 보여주며, 왜 그를 통해 이 시가 생각이 났는지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바랐다. 인연이면 누구라도 다시 만날 테니 기다리지 말라고, 그리워하지 말라고, 그 말이 하고 싶은 걸까. 그럼 백 년만 기다리면 연우가 살아 돌아올 테니 걱정 말고 네 삶을 살고 있으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아니야. 연우는 다시 만날 약속을 빠뜨리고 떠났으니, 그래서 연우를 다시 만날 날이 백 년쯤 남았을 지도 모르니, 그리워 해도 괜찮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아니야. 우리 너무 서둘렀다는 말이 하고픈 걸 수도 있어. 다만 우리가 무얼 서둘렀는지 모를 뿐이야.

 

정확히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 하면서 그냥 우현에게 이런 말을 하고팠다. 우리, 백 년 만에 다시 만났으니 이 다음엔 천 년 후쯤 만나자. 내가 너에게 연우라는 봄을 찾아주었으니 연우를 그리워하는 일은 이제 그만 하자.

 

그렇지만 어렴풋이 우현은 연우를 아주 오랫동안 더 그리워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연우가 아닌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고, 그럼으로 연우가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떠나보내기를 반복하면서도, 우현은 꾸준히 연우를 그리워할 거라는 그런 어렴풋한 예감. 그리고 동시에 성종은 알았다, 우현에게 연우를 그리워하지 말라는, 이제는 잊으라는 말 따위를 할 자격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그것은 오직 우현의 몫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

 

 

 

다들 이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의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아낸 건지 생각하며 세상 참 무섭다고 여겼다. 하루 종일 빗발치는 전화를 몽땅 무시하는 동안 익숙한 전화는 딱 세 번이었다. 세 번 다 명수였다. 아르바이트 중간에 명수에게 전화를 걸려하면 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와 포기하기 일쑤였다. 결국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 오늘 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터덜터덜 집 앞으로 오니 명수는 말끔한 얼굴로 그곳에 있었다. 어쩐지 반가운 마음에 미소를 지었다가, 반겨주는 얼굴은 잔뜩 심각해보여서 금세 미소를 거두었다.

 

 

“학교 잘 갔다 왔어? 시험 기간 아니야?”

“너 때문에 학교를 잘 갔다 왔는지, 시험인지 뭔지, 그냥 뭐가 뭔지 모르겠더라, 하루가.”

“나 미안해야 하는 거야?”

“왜 그랬냐.”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던 명수는 한숨을 폭 쉬고는 왜 그랬느냐고 물어왔다. 왜. 왜 그랬냐. 명수다운 물음이라고 생각했다. 글쎄. 왜 그랬을까.

 

 

“아저씨는?”

“묻는 말에 대답 좀 해. 왜 그랬냐고.”

“나는 아무 것도 아니거든.”

“무슨 말이야, 그건.”

“나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아저씨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은 아니니까.”

“그래서 뭐. 네가 책임이라도 지려고 그랬다는 거야?”

“아저씨는 그러셨잖아, 다 알아서 하겠다고. 다 책임지겠다고, 다 짊어지겠다고.”

“그래, 그랬는데 넌 왜 그랬냐고.”

“아저씨가 그렇게 하는 게 싫어서.”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또 지잉지잉 울려댔다. 하루 종일 울려대는 그것은 지치지도 않는지. 꺼버릴까 하다가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아 그냥 절로 꺼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앞으로 왠지 한참은 더 어린 애처럼 칭얼댈 것 같았다.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전원을 꺼버렸다. 그걸 도로 주머니에 넣고 명수를 보니, 그 행동들을 마냥 지켜보고만 있었는지 금세 다시 눈이 마주쳤다.

 

 

“이젠 말해봐.”

“뭘?”

“삼촌 좋아하냐.”

 

 

두어 달 전쯤 그와 재회를 했을 당시 들었던 물음을 또 똑같이 들었다. 그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물음을 묻는 이유에 대해서는 알 것 같았다.

 

 

“나, 아직 기억해. 네가 뭐라고 했었는지 토씨하나까지 다 기억하는 건 아닌데.”

“……”

“날 이해한다고 했잖아. 남자인 내가 남자인 너를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 이해한다고 했잖아.”

“……”

“중요한 건 행동이라고. 내가 너에게 좋은 마음을 갖고 있었는지 아닌지 보다, 그 마음으로 한 행동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그랬구나, 내가.”

“그랬어, 네가.”

 

 

어쩐지 명수의 눈을 똑바로 보고 있기가 싫어서 고개를 숙였다가, 그의 얼굴 옆으로 시선을 두었다가, 그의 목울대를 보았다가… 그런 부질없는 짓을 계속 했다. 그때 무슨 생각을 갖고 명수에게 그런 말을 했을까. 그는 그 오래된 말들이 지금 어떤 무게와 의미를 갖고 되살아났다고 말하려는 걸까 싶어졌다.

 

 

“그래서 알았어. 네가 삼촌 좋아하는 걸.”

 

 

그리고 그는 그 오래된 말들에 다시금 무게를 싣고 의미를 부여했다. 내가 했던 말이 나에게로 고스란히 돌아오는 일. 성종은 그 일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부정할 수도 없었다. 고개를 끄덕일 수도 그렇다고 내저을 수도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일이라면, 그 감정을 가진 이, 즉 성종 자신의 입에서 먼저 나왔어야 할 말을, 제 3자의 입을 통해 먼저 들어버렸다는 것이었다.

 

 

“명수야.”

“……”

“학교 계속 열심히 다닐 거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학교 다니기 싫지?”

“학교 얘기가 왜 나와, 지금.”

“그렇지. 그러니까 학교 안 다니는 건 어때?”

“뭐?”

“그 학교 때려 치면 다른 학교 갈 순 없어?”

“뭐라는 거야, 너.”

“공부를 못 했으니까 다른 학교에서 막 받아주진 않겠지.”

“야.”

 

 

땅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고 명수의 얼굴을 바로 보았다. 미간을 잔뜩 좁히고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의 표정을 마주한 거리가 멀지 않아서, 손을 뻗어 구겨진 예쁜 미간을 곱게 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맞아, 네 얼굴은 어디 하나 빠짐없이 잘났었지. 그렇게 인상을 써도 예쁘다고 여겨질 정도로 너는 고왔지. 싸움질이나 하고 다니는 애답지 않게 네 얼굴은…. 그래서 재회한 후에도 네 얼굴을 볼 때면 일상이 아닌 다른 삶 속에 있는 것 같다고도 생각했지. 너는 우현이처럼 잘 웃지도 않는 주제에, 왜 우현이만큼 예쁘게 여겨지기도 했던 건지. 너는 연우처럼 내게 특별하지도 않는 주제에, 왜 연우만큼 사랑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던 건지. 너는 아니, 명수야. 내가 너의 그 얼굴을, 그 얼굴로 인상을 쓰는 걸, 그 입술로 욕이나 신음을 내뱉는 걸, 그 얼굴로 가까이 다가와 입 맞춰 주는 걸, 그 얼굴로 내 시야 안에서 흔들리는 걸, 그것들을 그리워했던 나 자신을 끔찍하고 역겹게 여기기도 했다는 걸. 너는 모를 거야.

 

 

“내 옆에 있어준다고 했지, 너.”

“…어.”

“나 좋아한다고 했지, 너.”

“어.”

“나 바다가 있는 곳으로 가려고.”

“……”

“같이 가줄 거지, 너.”

“……”

“……”

“어.”

 

 

그 잘생긴 얼굴은 더 이상 인상을 쓰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웃거나 또 다른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아무 표정 없이 내뱉는 그 대답은 한결같이 긍정의 말이라서, 그 얼굴과 말투 그리고 목소리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무뚝뚝해도 아무 상관없었다. 명수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무엇’이 괜찮을 것 같은지,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아도 좋았다. 연우에게 미안한 일이라면, 이연우를 잃고 김명수를 가졌다는 것…. 조용히 팔을 끌어다 안아주는 명수의 품에서 연우를 추억했다.

 

장마가 시작 되면 우리 다시 만나자. 죽은 연우가 삶에 찾아올 때마다 연우에게 그런 말을 한 것 같았다. 그리고 연우 역시 그런 말을 해준 것 같았다. 연우는 장마가 시작 되고 떠났으니까. 혼자만의 어리석은 망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장마가 시작 되면 다시 만나자는 그 말을 철썩 같이 믿었다. 연우가 떠난 후 첫 장마였던 작년 이맘쯤엔 빗소리를 들으며 운 밤이 많았다. 그 때 왜 너는 어느 해의 장마라고 말하지 않았냐면서. 나는 여름이 오기만 기다렸다면서. 대체 장마는 언제 오는 건지 일기예보만 며칠을 봤다면서. 끝내 연우는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히 돌아올 리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제는 연우를 그만 놓아줄 때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죽은 연우의 뼈와 살은 그 애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찾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두었으니, 죽은 연우의 추억은 바다에 뿌리기로 했다. 바다 가까이에서 살며 연우의 추억을 몽땅 흩날려버리기로 했다. 그것 역시 장마가 시작 되면 연우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기대했던 그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고 미련한 생각일 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그래도 바다로 가고 싶었다. 바다로 가야했다. 바다로.

 

그 생각에는, 비가 된 연우가 바다로 흘러가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허튼 상념 역시 함께 하고 있었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 인생에서 연우를 완벽히 떼어놓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연우가 있는 곳을 찾아 세상의 온 바다를 다 떠돌며 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까지도 하고 있었다.

 

 

 

*

 

 

 

지난밤부터 내내 전화기를 꺼둔 상태였다. 알람이 없이 아침에 제 시간에 일어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익숙한 게 무서운 거라더니. 늘 일어나던 시간에 번쩍 눈이 떠지는 이 몸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전화기를 꺼두니 어제와는 다른 하루 같았다. 세상이 다 조용해진 것 같았다. 큰 일을 저질러놓고 나 몰라라 하는 느낌이라 조금의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그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연우를 잃고 명수를 가졌다는 것 외에 연우에게 미안한 일이 또 있었다. 또 한 사람을 곁에 두었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연우 다음으로 이 인생에서 가장 큰 사람일 것이었다. 생에 다시는 없을, 그리고 생에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는 사람. 김성규였다.

 

 

“왔니.”

 

 

남자의 집에는 웬일인지 명수가 없었다. 명수가 없는 게 다행인지 아닌지 헷갈렸지만 명수는 어디에 있냐고 물어도 되는지도 의문스러웠다. 평소와 같은 고요한 목소리로 반겨주는 그가 어쩐지 오늘은 마냥 익숙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런 일을 저지르면서도 걱정했었다, 혹시나 그가 화를 내거나 혼을 내면 어떡하지, 라고. 그리고 그가 그런다고 한다면 화가 됐든 혼이 됐든 마땅히 받아들이겠다는 각오도 했었다. 그렇지만 걱정과는 달리 오늘 남자의 얼굴은 예상보다 더 평온해 보였다. 잔뜩 움츠렸던 마음의 어깨를 펴고 안심해도 되는 걸까 싶어졌다.

 

 

“뭔가 불안해 보이는 표정이구나.”

“죄송해요.”

“……”

“제 맘대로… 그렇게 해버려서.”

 

 

남자가 손에 들고 있는 컵을 보았다. 성종이 선물한 찻잔 세트는 총 세 개였지만 남자는 깨진 것 외의 다른 것을 사용하지 않고, 원래 사용하던 본인의 것 중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가 고요히 차를 마셨고, 성종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똑같은 날이라고 혼자 머릿속에 새기려 해도, 어찌 된 까닭인지 이 공기부터 다른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좀 놀랐을 뿐이야.”

“……”

“내가 아는 너는… 그래, 넌 그렇게 용감한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언젠가 ‘혼자 밥을 먹는다’는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는 비슷한 말을 했었다. 성종이 넌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을 수 있을 만큼 씩씩하지 않지. 그의 눈에 비친 지난 시간의 이성종은, 용감하지도 씩씩하지도 않은 아이였다는 걸 성종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왜 그랬는지 물어봐도 되겠니.”

 

 

어젯밤 명수가 같은 물음을 던졌을 때 뭐라고 대답했던가. 컵을 보던 시선을 들어 올려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가느다랗고 서늘한 눈매가 천천히 감겼다 떠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당신이 다 책임지겠다는, 다 짊어지겠다는 그게 싫어서 그랬다고, 어떤 말을 빌려야 자신이 했던 행동들이 충동적으로 홧김에 한 일이 아니었다고 설명할 수 있는지 성종은 잠시 생각했다.

 

 

“아저씨.”

“응.”

“좋아해요.”

“……”

“잘 모르는 건 잘 모르는 채로 둬도 된다고 하셨죠.”

“……”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알게 되는 때가 오기도 하고, 혹은 제가 그걸 알고 싶어지는 때가 오기도 하는 거라고요.”

“그랬지.”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도 하셨죠. 그런데… 너무 늦게 알아버렸어요.”

 

 

서로의 눈을 단 한 번도 피하지 않고 온전히 마주하고 있는 그 순간이… 서툴렀다. 누군가의 시선을 이렇게 빠짐없이 꽉 채워 맞추고 있었던 때가, 있었던가. 언제였던가. 남의 눈에 들고 싶지 않아 피하기 급급했던 시간들이 스쳐 지났다. 그 시간 속의 이성종이란 사람은 이제 아주 많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 남자를 만나지 못 했다면 평생 겪지 못했을 변화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예전에 제가 명수에게 이런 말을 했대요.”

“……”

“나는 널 이해한다고. 남자인 네가 남자인 나를 좋아한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거, 이해한다고.”

“……”

“중요한 건 행동이라고. 네가 나에게 좋은 마음을 갖고 있었는지 아닌지 보다, 그 마음으로 한 행동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

“그래서 명수는 알았대요, 제가 아저씨를 좋아하고 있다는 걸.”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명수는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이해’라는 건 어디에서부터 오는 건지 어젯밤 이후로 내내 생각해왔다. 그리고 그건 오해에서부터 왔을 지도 모른다는 고찰에 도달했다. 성종 본인이 명수에 대해 가졌던 많은 오해…. 연우의 일을 겪은 이후로, 같은 남성을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명수가 더욱 끔찍하게 느껴지기도 했던 것에 대한 오해. 연우의 영상을 보고 호기심에 남자의 몸을 탐해보려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오해. 그런 것들을 비롯한 수많았던 오해들. 그 많은 오해를 거쳐 이해에 도달했던 지난 시간과, 그 이해를 되돌려 받은 지금. 성종은 또 생각했다, 같은 이해인데 왜 그 속에 있는 마음의 방향은 같지가 않은지. 김명수의 마음의 작대기가 성종 본인을 향해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왜 자신은 김명수가 아닌 김성규에게 향하고 있는지.

 

오늘의 공기는 왠지 평소와 다른 것 같다고 여겼던 건 성종 자신만의 착각 같은 게 아니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마음으로 이 남자 앞에 섰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명수가 이런 말도 했어요.”

“……”

“절 좋아한다면서…. 전하지 않고 뒤늦게 후회할 맘이라면 전해야 하는 거라고, 아저씨가 그랬다고.”

“……”

“후회할 것 같았어요. 아저씨한테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으면.”

 

 

아무 말도 없는 남자의 얼굴을 여전히 바라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그 어떤 말을 하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부정의 말을 한다면 당연히 슬플 테지만, 긍정의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남자의 눈을 맞추며 싱긋 웃었다. 이 남자 앞에서 그렇게 웃은 적이 있었나 싶어져서, 용기 내어 지어보인 미소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저, 도망가려구요.”

“……”

“근데 아저씨랑 안 갈 거예요.”

“……”

“지금쯤이면 아저씨도 떠날 수 있다고 하셨죠.”

“…응.”

“아저씨는 이제 서울로 가서 편해지셨으면 좋겠어요.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잖아요.”

“……”

“저는, 바다로 가고 싶어요.”

“……”

“어디든 상관없어요. 바닷가에 가고 싶어요.”

“……”

“명수랑 갈래요.”

 

 

남자의 표정이 아주 살짝 묘하게 바뀌었다고 느꼈지만, 불쾌하거나 기분이 나빠서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근데 아시잖아요, 저 돈도 없고 가진 거 아무 것도 없는 거.”

“……”

“명수 걔는 자기 밥벌이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도와줄게.”

“네, 당연히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

“많이 도와주세요. 지금까지 저 도와주셨던 거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요.”

“…그래.”

“저 그동안 못 했던 공부도 하고 싶고, 이것저것 배워보고 싶어요. 여행도 좀 하고 싶고, 명수랑 따뜻하고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요.”

“……”

“해주실 수 있잖아요. 저 때문에 회사 주식, 예전보다 더 올랐던 걸요.”

“그래, 다 해줄게.”

 

 

목소리에 웃음이 밴 것도 아니고 얼굴에 미소가 서린 것 같지 않은데도, 왠지 남자는 웃으면서 대답한 것 같았다. 그 대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서 성종은 전에 없던 미소를 지으며 활짝 웃었다.

 

 

“회사가 망했다고 하더라도,”

“……”

“내가 내 자리를 잃고, 재산을 잃고, 나에게 남은 게 아무 것도 없다고 하더라도,”

“……”

“네가 원하는 거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줬을 거야.”

“알고 있어요.”

“……”

“좋아해요, 아저씨.”

 

 

끝내 남자에게서는 어떤 직접적인 말을 듣지는 못했다. 아니, 그 말은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다. 언젠가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거의 모든 일에 있어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그리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고 말했지만, 그렇지 않은 일도 분명히 있다고 말했다. 그때 성종은 그렇지 않은 그 일이 무언지 물어보았으나 그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설령 죽게 되더라도 말 할 일 없을 거야.’ 사실 그 말을 들었던 그때 알았을 지도 몰랐다, 그가 죽게 되더라도 말 할 일 없을 거라던 그 말이, ‘좋아한다, 성종아’일 거라는 걸.

 

좋아한다는 마지막 말을 건네 놓고 웃다가, 작게 기지개를 켜며 찌뿌둥한 몸을 깨웠다. 지금쯤이면 명수에 대해 물어도 될 것 같았다.

 

 

“명수는 어디 있어요?”

“서울 올라갔어. 아빠한테 용돈 받아온다고.”

“그렇구나.”

 

 

어쩌면 명수는 분명 어떤 연락인가를 취했을 테지만, 어젯밤부터 전화기를 내내 꺼놨던 탓에 확인해 볼 생각조차 않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만큼은 명수가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저, 자고 가도 될까요.”

“그러렴.”

“여기, 침대에서. 아저씨랑 같이요.”

“…그래.”

 

 

안 된다고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단조롭고 참 한결같은 ‘그래’라는 대답이 더 반갑고 기쁘게 들렸는지도 몰랐다.

 

두어 달 전쯤 사용했던 칫솔이 그대로 있었다. 남자는 다른 화장실에서 씻고 오겠다며 집 안 쪽의 가장 큰 방으로 들어갔다. 빨리 씻고 그가 오기 전에 침대 안쪽으로 들어가 누워 자는 척을 하고 싶다고, 혼자 생각했다.

 

그리고 바랐던 대로 성종이 눈을 감자마자 남자가 방에 들어왔고, 연한 빛의 수면등 만을 켜둔 채 방의 불을 껐다. 그가 조용한 걸음으로 다가와 조심히 침대 위로 올라오는 걸 소리로만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을 거였다, 성종이 벌써 잠에 들지는 않았을 거란 것을.

 

 

“팔베개, 해줄까.”

“…네.”

 

 

 

*

 

 

 

팬시점에서 예쁜 색의 펜과 봉투가 들어있는 편지지 세트를 사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펜은 밝은 파란색이었고, 편지지는 환한 아이보리. 지금 머무는 이곳과 잘 어울리는 색이라고 생각했다. 진동이 울려서 전화기를 꺼내보았다. 여전히 마음에 아련하게 남아있는 글자 세 개가 반짝거렸다.

 

 

“네, 아저씨.”

‘학원 등록 했니?’

“네. 다음 주부터 시작해요.”

‘그래. 명수는 잘 지내고?’

“아무 것도 않고 집에서 놀기만 하는데 잘 지내야죠, 걔는.”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겹쳤다. 성종은 자신이 이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다가도, 그가 그렇게 웃어주는 일에 더 놀라기도 했다. 시간이 더 지나면 자연스러운 일이 될 거라고 믿어보았다.

 

 

“아저씨는 잘 지내시죠?”

‘잘 지내지, 네 덕분에. 성종이 넌 잘 지내니?’

“네, 저도 아저씨 덕분에요.”

‘아픈 데는 없지?’

“너무 건강해요.”

‘밥은 잘 챙겨 먹니?’

“네. 이제 혼자가 아니니까요.”

 

 

그 말을 하면서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의 하늘은 깨끗하고 맑은 날이 많은 편이었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바다가 있고, 가고자 하면 숲에도 금세 들어갈 수 있는 곳.

 

남자가 마련해주어 명수와 함께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원했던 대로 집은, 여름에는 시원했고 가을인 지금은 추운 날엔 따뜻해질 수도 있었다. 먹고 싶은 음식이 있으면 명수와 먹으러 나가거나 시켜 먹곤 하는 그런 일상 안에서 종종 남자를 떠올렸다. 매번 고맙다는 인사를 직접 전하지는 못 했지만, 늘 마음으로는 감사하고 있었다. 지금의 모든 걸 가능케 해준 사람이었으니까.

 

 

“어디 갔다 오냐.”

 

 

소파에서 리모컨을 손에 들고 길쭉하게 누워있던 명수는 어기적 몸을 일으켰다. 몰라도 돼, 그런 말을 대충 던져주고, 주방과 거실 사이의 작은 식탁에 앉았다. 사온 펜과 편지지를 꺼냈다.

 

 

“뭐하냐.”

“몰라도 된다구.”

“편지 쓰냐? 편지? 21세기에 편지?”

“그래, 21세기에 편지 받으면 얼마나 로맨틱 하겠어.”

 

 

어느새 식탁 가까이에 다가와 있는 명수의 그 말이 못마땅해서 눈을 치켜뜨고 노려봐주다가 왼팔을 굽혀 편지지를 가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근처 어디 카페에라도 앉아 쓰고 올 걸 그랬다는 후회가 살짝 밀려왔다.

 

 

“누구한테 쓰는데.”

“알아서 뭐하게.”

“나 두고 바람피우는 거 아니지, 너.”

“바람피우면 어쩔 건데.”

“어떤 새낀지 찾아내서 죽도록 패줘야지.”

“너는 할 줄 아는 게 사람 패는 거 밖에 없지?”

“야, 나 할 줄 아는 거 많아!”

“뭐 있는데. 말해봐.”

“너랑 밥 먹고, 너랑 쇼핑하고, 너랑 바다 보러 가고.”

“참나….”

“너랑 잠도 자고, 너랑 섹스도 하고.”

“아, 시끄러. 저리 좀 가.”

 

 

등 뒤로 다가와 어깨에 팔을 감아 안아오는 명수를 우악스럽게 밀쳐냈다. 칫, 그런 소리를 내며 다시 소파로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웃다가 다시 펜을 잡았다.

 

 

우현이에게.

우현아. 그리고 연우야.

날씨가 조금씩 추워지고 있어. 감기는 거리지 않았니?

잘 지내지? 나는 잘 지내. 네가 다녀간 여름이 얼마 전이었는데 엄청 오래 전인 것 같아. 벌써 보고 싶나봐. 겨울 방학 하면 또 놀러와. 좀 춥겠지만 그래도 여긴 예쁠 테니까.

운전면허를 따려고 학원에 등록했어. 겨울에 네가 오면 차를 렌트해서 이번엔 더 멀리까지 같이 가보자. 맛집도 찾아보고, 제일 예쁘고 좋은 곳만 데려가줄게.

아직 겨울이 되지도 않았는데 널 만날 생각을 하니까 더 보고 싶다. 연우야. 우현아.

 

 

 

 

-

 

 

 

성종아 사랑해 좋아해 행복하자... 그런 말을 손에 달고 살았던 시절이 있었네요. 5-6년 전쯤 제가 썼던 글을 읽어보다가 그 당시 후반부에 적었던 짧은 조각글 몇 개에는 성종이 외에 다른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는 걸 발견했어요. 당시 저에게 인피니트는 무엇이었는지, 성종인 어떤 존재였는지 팬픽을 다시 쓰기 시작하면서 혼자 골몰했답니다. 긴시간 팬픽을 쓰지 못했던 건 제 삶이 바빠져서의 이유도 있었지만, 인피니트라는 이름이 더 이상 그냥 마냥 좋아하는 아이돌이 아니게 되어서의 이유도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 제 픽션 속의 명수, 우현, 성규와 같은 이름들을 보면 죄를 짓는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주인공이 뚜렷해진 제 글을 보고있노라니 귀한 이름을 빌려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도 같아요. 사랑은 무엇인가, 라는 주제로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의 저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글을 쓰지 않으면 더 큰 죄를 짓는 걸 거라며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사실 울타리는 오래 전에 제가 썼던 짧은 글에 살을 붙이고 스토리를 변경해 다시 쓴 글이었어요. 그때의 성종인 여전히 제게 남아있는데 다른 주인공이었던 이는 이제는 불러보기도 마음이 아픈 이름이라 큰 죄를 짓는 심정으로 감히 명수의 이름을 빌렸어요. 그래서 인피니트라는 이름을 지켜주고 있는 성종이와 멤버들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그 당시 성종인 저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다서여섯 살은 더 어렸어서 사랑에 열정적이었던 그 기억을 꾸역꾸역 꺼내본 저에게 지금의 성종인 또 어떤 존재인지 많은 생각이 드네요. 8-9년 째 저의 말도 안 되는 사랑 나부랭이의 주인공은 늘 성종이었고, 성종일 주인공으로 글을 쓰는 순간만큼은 그를 위해 목숨을 백 번 천 번을 버리고서도 행복할 수 있는 건 사실 저인지도 모르겠어요. 팬픽이란 걸 쓰게 되면서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게 그냥 마냥 좋아하는 마음이면 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아버린 지금의 저는 성종이를 사랑하는 일이 이렇게 벅차기도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도 잘 모르면서 말이 길어졌네요... 제 이야기 속 주인공들을 애달피 여겨주셔서 고맙다고 전하고 싶었나 봅니다. 읽어주신 여러분이 아니라면 이런 말들 할 수도 없고, 그리고 이런 제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이 계셨기 때문에 울타리도 있을 수 있었어요.

울타리가 이렇게 끝났어요. 그동안 함께 해주신 노고에 깊은 감사 전합니다.

 

 

 

 

Posted by Jo_see :